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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y 03. 2024

인터스텔라 - 항성과 항성, 마음과 마음 사이 (3)



  블랙홀의 특이점으로 진입한 쿠퍼는 테서렉트에 도착한다. 바로 이곳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영화를 향한 이해의 끈을 겨우 붙잡고 있던 수많은 관객들이 손을 놓아버린 곳이다. 영화 초반 브랜드 박사와 아멜리아는 웜홀과 이상 중력 현상을 설명하며 웜홀을 열어주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들’을 언급했다. 웜홀을 열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가졌으며 인류를 위해 그걸 활용할 만큼 호의적인 그들. 그들이 쿠퍼를 테서렉트로 이끌었다. 테서렉트는 4차원 공간이다. 평면적인 사각형에 Z축을 하나 추가하면 입체적인 3차원 큐브가 되고, 큐브에 축을 추가한 것을 테서렉트라고 한다. 영화의 가설에 따르면, 우리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거나 맘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 절대적인 법칙이라서가 아니라, 시간이 우리가 속한 3차원 세계 바깥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2차원 세상에서 입체적인 도형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테서렉트는 시간을 보고 인지할 수 있는 고차원 공간이며, 그곳에 들어간 쿠퍼는 시간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다만 3차원의 존재인 쿠퍼는 4차원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그들은 테서렉트를 3차원의 공간인 큐브 형태로 구현하여 쿠퍼에게 보이고 있다. 4차원인 테서렉트를 열고 닫고 편집할 수 있는 그들은 아마도 5차원의 존재들일 것이다. 그들이 열어놓은 공간은 바로 머피의 방이다. 이상 중력 현상이 벌어지던 그곳. 5차원의 존재인 그들은 역으로 3차원에 직접 간섭하지 못하기 때문에 3차원의 주민인 쿠퍼를 테서렉트로 데려왔다. 그리고 쿠퍼가 시공간을 뛰어넘는 힘인 중력을 이용하여 무언가 해내길 바란다.

  물론 중력이다. 중력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테서렉트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머피의 방과 테서렉트는 엄연히 다른 물리적 공간이며, 손을 불쑥 집어넣어 뭔가 떨어뜨리거나 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중력을 이용하여 간접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 '그들'이 인류에게 중력으로 웜홀을 열어준 것처럼 말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쿠퍼가 시간을 뒤틀어 미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시간여행하면 생각하는 경우지만 (과거로 돌아가 원래 속했던 현재와 미래를 바꾼다.) 실제로 시간여행이 가능하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요컨대, 과거를 바꾸기 위한 행위의 결과로서 도출된 것이 이미 지금의 현재이다. 예를 들어, 쿠퍼가 테서렉트 속에서 과거의 머피의 방에서 책을 한 권 떨어뜨렸다. 이때 ‘책이 떨어지지 않은 미래’가 쿠퍼가 책을 떨어뜨린 결과로 ‘책이 떨어진 미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이미 ‘책이 떨어진 미래’로 정해져 있고, 쿠퍼가 책을 떨어뜨림으로서 그것이 완성되는 것이다.


  테서렉트 속에서 마침내 다시 보는 딸은 자신이 떠나던 순간의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그리고 눈앞에서 과거의 자신은 또 한 번 딸을 버리고 떠나려고 한다. 떠나는 순간에 쿠퍼는 머피에게 시계를 선물했다. 아빠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거나 블랙홀 근처를 지나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며, 돌아온 아빠와 시곗바늘을 맞춰보면 재밌을 거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쿠퍼 자신도 모른다는 것을 간파한,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머피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가버리라며 시계를 집어던진다. 쿠퍼는 돌아누운 딸을 껴안으며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을 한다. 그토록 후회하고 그리워하던 그 순간이 펼쳐진다. 만약 그때 떠나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책장 뒤편에서 중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쿠퍼는 필사적으로 책을 모스부호대로 떨어뜨려 S.T.A.Y라는 글자를 완성한다. 그것은 과거 어린 머피가 떠나려는 자신을 말리며 했던 말이다. 그리고 어린 머피는 그것을 읽어낸다.


"그들 메시지를 알아냈어. Stay. ‘가지 마’ 야 아빠."
 머피 쿠퍼


  테서렉트 속에는 머피의 방의 모든 순간들이 담겨 있다. 쿠퍼는 과거 머피의 방에서 벌어졌던 이상 현상이 자신이 일으킨 것이며, 다른 이상현상들 역시 자신이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함께 테서렉트에 들어온 로봇 타스에게 나사의 좌표를 이진법으로 전달받고, 그 이진법의 형태로 머피의 방에 먼지를 내려앉힌다. 직접 과거의 자신에게 나사의 위치를 알린다. 쿠퍼는 시간의 충실한 행위자로서 겪은 사건들을 몸소 일으킨다. 쿠퍼와 머피의 과거, 그리고 위기에 처한 머피의 위기를 구해내기 위해 행동한다.


  인류를 구원하리라 선택받은 것은 머피가 아닌 쿠퍼였다. 쿠퍼가 테서렉트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쿠퍼가 머피를 영원히 사랑하는 그녀의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영원히 염려하는 존재, 그녀를 위해서라면 블랙홀 속으로라도 뛰어들 존재. 문득 그것을 깨달은 쿠퍼는 테서렉트에 함께 들어온 타스에게서 블랙홀 속 양자 데이터를 모스부호로 변환해 전달받는다.


"내가 머피에게 전할 방법을 찾아내겠어."

"어떻게요, 쿠퍼."

"사랑이야, 타스. 브랜드가 옳았어. 머피에 대한 나의 사랑, 그게 열쇠야."

"우리가 뭘 해야하죠?"

"시계. 초침의 움직임에 데이터를 심는 거야."

"만약 머피가 시게를 가지러 오지 않으면요?"

"올 거야. 반드시 와."

"어떻게 장담하죠?"

"내가 준 시계거든."

조셉 쿠퍼와 타스


  그렇다. 사랑이다. 쿠퍼가 머피의 곁을 떠난 것도, 그리고 다시 돌아오고 싶은 것도, 그가 먼 우주에서 온갖 위기를 파헤치고 살아남아 테서렉트까지 당도한 것도, 테서렉트 속에서 어떻게든 머피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도, 머피가 시계를 가져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나이든 머피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그 유령이 아버지였음을 직감하고, 마침내 시계를 발견해 아버지가 보낸 데이터를 받은 것 전부. 중력과 사랑은 시공간을 꿰뚫고 작용한다. 테서렉트에서 쿠퍼의 사랑은 먼 과거 먼 우주에 있는 머피와 쿠퍼를 연결한다. 쿠퍼는 나사의 인류 구원 임무에 필요한 비행사로서 머피를 떠나야 했지만 테서렉트에 들어온 순간, 머피의 방에서의 머피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그녀를 염려하고 이끌고 사랑하는 유령이 된다.


  사랑은 정말 물리적인 차원의 하나일까? 4차원이 시공간이라면 5차원은 사랑일까? 그렇다면 테서렉트를 열어준 존재들은 사랑이라는 차원에 살아가는 이들일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이 사랑이라는 힘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아는 이들임은 확실하다. 사랑을 행하고 느끼는, 사랑의 주체인 쿠퍼는 (로봇인 타스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그들이 어떤 외계의 존재가 아니라 5차원까지 도달한 미래의 인류임을 직감‧확신한다. 미래의 인류는 머피라는 구원자를 선택해 쿠퍼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힘으로 그녀를 돕게 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의 과거를 구하기 위해서. 머피는 마침내 시계를 발견하고, 아버지가 함께 있음을 깨닫고 환희에 잠긴다. 자신을 쫓아내려고 온 오빠 톰을 껴안으며 아버지가 모두를 구원할 것이라며 소리 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중력방정식을 완성한다.


  톰은 지구와 함께 죽어가려는 답답하고 꽉 막힌 인물처럼 보인다. 먼지의 영향으로 톰의 식구들이 목 질환을 앓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머피와 조수에게 톰은 고집을 부리며 거절의사를 밝힌다. 조수를 때리기까지 한다. 쿠퍼가 떠나기 전에도 톰은 현재 지구의 환경에 잘 적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 영화를 꼼꼼히 보며, 톰은 그저 톰의 방식으로 쿠퍼를 그리워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주로 나간 쿠퍼에게 끈기 있게 메시지를 보냈다. 떠나는 쿠퍼가 톰에게 건넨 마지막 말 중 하나는 ‘이 집을 잘 부탁한다.’ 였다. 톰이 죽어도 집을 나가지 않으려는 것, (소설판에서 밝혀지기로) 톰이 끝까지 지구에 남아 그 집에서 죽은 것은 아버지의 부탁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흔적이 지구에 유일하게 남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나였다, 머피. 내가 그 유령이었어."

"알아요.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 전 아빠가 돌아오실 걸 알았아요."

"어떻게?"

인터스텔라, 조셉과 머피 쿠퍼


  쿠퍼가 목적을 완수하자 테서렉트가 닫힌다. 밖에선 그 사이에 50년이 더 흘렀다(가르강튀아 블랙홀에 휘말리며 발생한 시간손실). 그들은 테서렉트를 닫으며 친절하게도 쿠퍼를 토성의 주변으로 보냈다. 머피가 풀어낸 중력방정식, 그것으로 띄운 스페이스 콜로니가 토성 주위를 자전하고 있다. 그들은 역시 사랑을 이해하는 존재들이다. 중력을 조작할 수 있게 된 인류는 콜로니 속 중력을 구부려 한정된 공간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흐르는 시간에 노쇠한 머피는 쿠퍼를 기다리며 들었던 냉동수면에서 마침내 깨어난다. 마침내 머피와 쿠퍼는 드디어 재회한다. 부모와 자식에서 우주를 떠돌다가 유령을 거쳐, 다시 아버지와 딸로. 아버지는 결국 약속을 지켜냈다. 노인이 된 머피는 아이처럼 웃는다. 쿠퍼가 선물한 시계를 차고, 그립던 그의 손을 꼭 쥔 채로.


  플랜 A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에드먼드 행성에 도착한 아멜리아는 산사태가 에드먼드가 수면 중인 캠프를 덮쳤고, 그가 죽으며 신호가 끊겼음을 알게 된다. 에드먼드가 보낸 신호는 전부 진실이었다. 아멜리아는 우주복 헬멧을 벗고 산소가 풍부한 공기를 호흡한다. 인류의 새로운 터전이 될 그곳에서 동면하며, 그녀는 쿠퍼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류는 곧 에드먼드 행성에 안착할 것이다.


  에드먼드가 불모지인 만 행성에 갔어도 그는 진실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이 행성은 적합한 후보가 아니니 이곳에서 죽는 것은 나 혼자만으로 족하다고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숭고할 수 있는 이유도 이 영화의 주제인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을 절실하고 필사적으로, 무엇도 희생할 수 있게 만든다. 소중한 이 없는 만 박사, 그래서 자신이 가장 소중한 만 박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행성의 데이터를 속였지만 에드먼드는 지구에 남은 아멜리아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 인터스텔라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시 사랑이다. 독특하고 어려운 소재와 무대를 배경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플롯을 통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유튜브에서 알게 된 정보인데, 인터스텔라의 작곡을 맡은 한스 짐머가 누구나 다 아는 그 인터스텔라의 주제곡을 쓸 때 놀란 감독에게 받은 주문은 ‘딸과의 약속을 어긴 아버지의 곡을 써 달라.’였다고 한다. 그것만 듣고 우주와 어울리는 음악을 만든 한스 짐머의 능력에 대한 감탄이 이어지는 가운데 걸작이었던 댓글이 ‘때로는 부모와 자식들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우주만큼 넓다.’였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특히 20세기부터) 인류가 알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은 체계적으로 답이 딱딱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와 비존재가 중첩된 상태로 놓여있다. 하다 못해 앞의 사과 조차 말이다. 우주는 왜곡이 가능하고 가변적이며 때로는 눈앞에 있는 것조차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꼭 인간의 마음과 닮아있다. 우주와 인간은 감정적이고 모순적이다.

  우리의 마음은 가까웠다가도 멀어지고,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으며 실제보다 과장되기도 한다. 항성과 항성 사이의 거리(인터-스텔라),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확신할 수 없고 극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도저히 닿을 수 없어보였던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기도 한다. 긴 역경을 거쳐, 온 우주를 방황한 끝에 마침내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킨 아버지와 그의 딸처럼.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중력과 사랑 뿐이다.


"우리 아빠가 내게 약속했으니까요."

"그래, 머피. 아빠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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