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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06. 2024

「파묘」 리뷰 1부 – 무덤을 들추다

다분히 긍정적인 1부와 비판적인 2부, 중 1부


  장재현 감독.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정말 소중한 사람이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서양식 오컬트 영화를 한국적으로 해석했으며, 「사바하」에서는 ‘한국식 오컬트’에 도전했다. 「검은 사제들」은 장르성이 강해 (강동원의 얼굴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 장르영화였고「사바하」는 난해함을 비롯한 특유의 정돈되지 않은 느낌으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그럼에도 우리나라가 오컬트 영화의 불모지였다는 점에서 (장르에 대한 팬심을 섞어) 장재현 감독을 그래도 높게 평하고 싶다. 그래서 올해 2월 22일에 개봉한 「파묘」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입장을 둘로 나눠, 1부에서는 영화의 줄거리나 의미에 대한 고찰과 해석을 위주로 하고 2부에서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에서 말해보겠다.

  물론 이 글에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온전히 보고 싶다면 관람 후 읽는 것이 좋겠다.




  전작인 「사바하」에선 미스터리 추리와 오컬트 장르가 혼합된 영화로써 알쏭달쏭한 줄거리와 플롯을 관람을 완료한 후 짜맞춰가는 재미가 있다. 「사바하」가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만을 받지 못한 것과 별개로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가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파묘」는 그럴 여지가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상징과 수수께끼들을 흩뿌려놓긴 했으나 전체 전개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며, 그것들을 캐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어렵지 않다. 좋게 말하자면 영화가 쉽다고,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단순하거나 깊이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한번 주의 깊게 읽어보도록 하겠다. 영화는 자체적으로 6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거기에 추가로 이 리뷰에서는 6장의 분류 외에도 영화의 분위기와 장르가 크게 바뀌는 4장을 경계로 '1부'와 '2부'를 나누어 칭하도록 하겠다.



뱀은 수많은 문화권에 걸쳐, 전승에 따라 요괴와 영물을 오간다. 아무튼 심상치 않은 동물이라고 생각해온 듯하다. 사진은 누룩뱀.


뱀이 예고한 반전

  영화 초반 지관 ‘김상덕’의 내레이션이 나오는 장면에서 상덕이 산을 노닐 때, 소나무 뒤에 숨겨져 있던 송이버섯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송이를 지키다가 물러나는 듯이 멀어지는 뱀을 보며 씩 웃는다. 옛 속설 중에 삼을 포함한 약초나 버섯 주변엔 그것을 지키는 영물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물인 뱀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질이 좋은 송이라는 뜻이다. ‘뱀과 뱀이 지키는 무언가’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박지용’이 의뢰한 ‘박근현’의 관을 들어낸 자리에는 여자 얼굴을 한, 괴상하고 꺼림칙한 뱀이 기어 다닌다. 인부가 뱀의 머리를 삽으로 죽이자 그것은 비명을 지르고, 곧바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쏟아지며 본격적으로 참극이 시작된다. 후에 밝혀지는 것은 해당 무덤 자리에 첩장을 했던 탓에 밑에 관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앞의 도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뱀과 뱀이 지키는 무언가’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그 뱀이 지키는 것은 숨겨진 관이다. 사람 얼굴의 뱀은 1부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2부의 화두인 정체를 알 수 없는 관의 존재를 미리 알린 셈이다. 그 안에 든 것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암시도 함께 말이다.



오니와 같은 일본의 정령들은 유독 공격적이라고 작중 언급된다. 잦은 자연재해와 내란 때문일까. 근데 왜 우리 땅에서 난리...


여우야 여우야 오니였니…?

  나는 제대로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관에서 튀어나온 오니를 여우와 연관된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보았다. 박근현의 묫자리를 봐줬다고 언급되는 스님인 ‘기순애’가 여우(키츠네)로 불린 것과 간을 탐하는 그것의 모습이 여우와 관련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구미호 등의 여우 요괴가 사람이나 가축의 간을 탐한다는 설화는 흔히 알려져 있다. 관 속 괴물이 활동하면서 언급되는 묘사인 ‘누린내’ 역시 야생 짐승인데다 취선을 지녀 냄새가 나는 여우와 일치한다. (이때 누린내는 악령이 들린 ‘부마자’의 징후인 폭식과 누린내와는 엄밀히 구별된다. 관 속 괴물은 부마자가 당연히 아니므로 그것에게서 나는 냄새로 보아야 할 것이다.) 풀려나자마자 한 행동이 축사로 가 돼지들의 간을 빼먹은 것이니, 여우 요괴나 귀신일 거라고 거의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장군 오니라고 정체가 밝혀졌을 땐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오니는 왜 여우 같은 행동들을 하는 것일까? 

  후반부에 가면서 2부의 주제의식이 뚜렷해지며 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었다. 2부의 주제는 조선을 영적으로까지 지배하려했던 일제의 사념과 한반도 흙을 밟고 살아가는 후손들의 싸움으로 귀결된다. 박근현의 악령이 든 박지용은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고 말하고 죽는다. 조선은 호랑이, 일제는 호랑이의 척추를 끊으려는 여우로 대표된다. 즉 이 관계에서 오니는 일제와 일제의 악행 자체를 상징하는 여우가 된 것이다. 그것의 정체는 장군 오니지만, 두 이념의 대립에서는 여우를 맡는다.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에 대해 더 의미부여를 하자면 핵심장기를 빼가는 행위가 일제의 수탈과도 같으며, 오니에게 공격당한 법사 ‘윤봉길’이 척추를 다치기도 했다.



일 끝나고 삼겹살 고? 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봉밥의 민족

  작중에 끊임없이 무언가 먹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나는 대중매체에서 ‘먹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고 보는데, 바로 ‘지긋지긋하면서도 소중한 우리의 삶’이다. 때론 지저분하고 추잡스럽게도 보일 수 있는 '먹는다'는 행위는, 실은 아무리 고귀한 자라도 해야 하는 것으로 삶과 강력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들이 사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룹에 따라 먹는 방식이 다른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4인방은 먹는 모습을 편하게 자주 보이며, 종종 함께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다. 상덕과 장의사 ‘고영근’은 송이와 고기를 함께 구워먹고 곧 그 자리에 무당 ‘이화림’과 봉길이 끼어든다. 상덕, 영근, 화림과 봉길은 ‘보국사’의 스님이 말아준 국수와 내온 술을 다 같이 먹는다. 상덕이 입원한 병실에서 일행이 피자와 빵 등을 먹기도 한다. 가장 소시민적 인물인 영근이 육개장을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봉길은 앵글 뒤에서 계속 무언가(햄버거 등)를 먹고 있다.

  반면 의뢰인인 박씨 가문은 함께는커녕, 무언가 먹는 행위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부유한 가문이 간단한 다과조차 내오지 않아, 그들의 저택에서(병실이었나…? 확실하지 않다.) 화림과 봉길이 캔 음료를 나눠 마시기도 한다. 그들이 먹는 묘사라고는 악령으로 변한 박근현이 아들 ‘박종순’의 뒤편 식탁에서 무언가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이 전부이다. 직후 박근현은 ‘여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데, 나는 춥고 배고프다’고 외치며 박종순을 죽인다. 이들은 같은 핏줄임에도 서로 음식을 공유하지 못하며, 도리어 음식으로 서로를 홀대한다. 이기심과 서로를 향한 거리감이 먹는 행위로 표현되고 있다.

  오니의 경우 짐승들의 간을 빼먹거나 사람의 간을 탐하는 대사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은어를 먹는 장면만 등장한다. 오니가 먹는 것은 직접 빼앗은 것들뿐이다. 오니는 만 명을 베고 신이 되었다고 언급되니 공물도 종종 바쳐졌을듯 하나, 그가 보인 호전적이고 공포스러운 보았을 때는 신으로서의 오니에게 바쳐졌을 공물들 역시 어떤 이해관계나 각종 목적을 가지고 바쳐졌을 것이다. 당장 작중 그가 먹는 은어도 그를 꾀어내려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간은 말할 것도 없이 강제로 생명을 해쳐 갈취한 것이다. 오니의 먹는 행위는 그것의 성격은 물론이고 그가 상징하는 침략자로서 일제의 성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기일이나 명절마다 조상님 식사까지 챙기는, 광기의 식도락 민족이 우리 아닌가.

  영화의 첫 장면은 상덕과 영근이 어느 노인의 관을 들추며 시작한다. 상덕은 ‘누군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틀니를 가지고 있어 할머니가 먹지 못해 배가 고프시다.’고 말하고, 틀니를 숨긴 손자는 ‘이게 없으면 무엇으로 할머니를 추억하느냐’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온 가족이 감싸 안으며 슬픔을 공유헌다. 직후 상덕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핏줄, 같은 DNA로 엮인 공혈의 집단.” 이 작품은, 핏줄이란 앞서 손자와 할머니나 주인공 4인방으로 볼 수 있듯 음식으로 따듯함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임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1부와 2부를 관통하는 큰 주제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아픔에 둔감하고 음식을 나누지 않는 박씨 가문은 그들의 큰 어른을 외로움과 배고픔에 사무친 악령으로 만들었고 그 화가 그들을 덮친다. 나라도 팔아먹은 집안이니, 놀라울 것도 없다. 민족도 배반하는 이들이 자신의 핏줄이라고 어려울까. 반면 주인공 4인방은 피붙이가 아님에도 음식을 나눠먹고 역경과 고난을 함께하며 가족이 되어간다. 영화 초반 화림과 봉길이 상덕과 영근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싸한 얼굴들'이라고 언급한 것과, 일을 맡지 않겠다는 상덕의 고압적인 태도와 이에 맞서는 화림의 '꼰대'라는 대사를 보면 그들은 극히 이해타산적인 관계로 시작했다. 결말에 상덕 딸의 결혼사진을 찍으며 봉길이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 뭐’라는 대사는 매우 직접적이다. 병실에서 자꾸 무언가 먹는 영근, 화림, 봉길에게 금식 중인 상덕이 ‘여기가 맛집이냐’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들이 ‘먹는다’는 행위로 이어져있는 애정 어린 관계임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먹는다’는 행위는 삶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들이 오니와 맞서며 지키려고 했던 것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백두대간을 밟고 평화롭게 먹고 사는 것이다. 악을 물리친 뒤 이어지는 병실에서의 먹방은 이를 표현하는 듯하다. 이때 이들은 그저 소박하고 소시민적으로 보인다. 결국 샤머니즘도 인간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파낸 것, 파내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무덤이란 근본적으로 누군가나 어떤 집단의 과거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파묘’는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개선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극초반 손자와 할머니를 제외하고) 1부와 2부 둘 다 제대로 파묘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전적으로 파묘는 관을 꺼내는 것 뿐 아니라 옮겨 묻는 것까지 포함한다. 1부에선 들어낸 관을 통째로 태워버렸으며(물론 이후 화장한 것을 새로 안치했다면 모르겠으나, 작중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으며 후손을 셋이나 죽인데다가 아기까지 헤치려 한 박근현을 과연 제대로 모셨을지는….) 2부에선 오니가 관을 찢고 나왔고 상덕의 기지로 최후를 맞이했다. 관이 훼손되었을 뿐더러 이젠 내용물도 없고, 그 파렴치한 것을 다시 묻어줄 사람도 없다.

  다만 이 영화에서 파묘한 것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아닐까? 그 악지의 묫자리는 우리의 쓰라린 과거를 상징한다. 영화의 전체 과정은, 일제강점기라는 과오와 상처를 아주 깊숙이 첩장된 것까지 들어내어 올바르게 묻음으로써 치유하는 행위로 읽힌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박근현과, 우리 땅에 박힌 말뚝 그 자체인 오니가 불타고 퇴치된 것이야말로 옳은 파묘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픔을 치유하고 솎아내기 위한 파묘였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상흔을 남긴다. 사건을 잘 해결한 네 주인공들이 후유증을 앓는 장면이 에필로그에서 보여진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온 대한민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지나온 과거지만, 지금도 종종 호출되어 아픔을 남긴다.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면 훈장처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일종의 샤머니즘에 종사하는 그들에게는 뜻깊은 경험이자 이어갈 삶의 토대가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격동의 근대시기를 보내고 급속도로 발전한 것처럼 말이다.




기타 이야깃거리

  감독의 ‘허리가 끊긴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처럼, 이 영화는 1부와 2부로 극명하게 나뉜 것이 마치 허리가 끊긴 것 같다. 이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가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지만 상업영화로서 도전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1부와 2부의 분위기를 가르는 상덕의 대사 “첩장이다.”는, 그 악지에 관이 두 개나 묻혀 있었다는 반전과 더불어 묫자리에 조성된 무겁게 짓누르는 분위기와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관이 수직으로 세워진 것이 그 자체로 땅에 박힌 말뚝이었다는 반전도 독창적으로 느껴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김고은의 무당 연기도 강렬했고, 이도현의 첫 스크린 데뷔도 인상적이었으나 최민식과 유해진은 그냥 배역 그 자체였다. 괜히 대배우들이 아니다…. 그렇게 대표작들이 많음에도 지난 배역들이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도깨비불을 본 상덕, 영근, 화림은 주마등을 보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나 화림의 경우 주마등과 회상에서 본 작품에서 보여주지 않은 장면들이 지나간다. 그저 이 작품에서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한 개연성 마련 정도라고 보기에는 시각적으로 장면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감독이 화림의 과거나 이후를 다루는 속편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법 하다.



  이상 매우 호의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1부 리뷰였다. 분석과 내 견해까지 곁들이다보니 글이 길어졌는데, 사실 나는 이 작품을 많이 아쉽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에 대해선 2부에서 자세히 논해보도록 하겠다. 2부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만큼 훨씬 짧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누룩뱀: https://ko.wikipedia.org/wiki/%EB%88%84%EB%A3%A9%EB%B1%80

오니: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B%88_%28%EA%B7%80%EC%8B%A0%29

영화 이미지 자료: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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