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의 끝에서
한밤 중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입원하신 외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사신 외할머니께서 이제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계셨다.
새벽녘 병원으로 가는 길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초조한 마음이 앞섰다.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늘 생명을 살리는 이 장소가 오늘만큼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하얀 복도를 지나 멀리서 환히 빛나는 병실을 향해 나아갔고 문을 열었다. 평생 본 적 없는 모습의 외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항상 반듯하게 허리를 세워 앉으시고 웃으며 반겨주시던 그분이, 이제는 하얀 병상에 누워 호흡기를 끼고,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 모습으로 힘겹게 호흡하시는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께 밝은 미소로 인사드리지 않았던 그때,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외할머니를 마주했더라면.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오래 함께했더라면.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헛된 후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억들은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눌렀다.
의료기기들의 규칙적인 소리가 낯설고 아득하게 느껴져 꿈만 같았다. 이틀 동안 굳게 닫혀있던 외할머니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그 눈동자는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담으며 머물렀다.
문득 저 눈이 담아 온 세월의 무게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흐릿하지만 여전히 맑게 빛나는 두 눈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또렷이 새기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외할머니의 모습이 흐려졌다. 마지막은 밝게 웃어야 속상하지 않으실 텐데 눈앞을 흐리게 만드는 눈물이 너무 야속했다. 외할머니도 우리를 이리도 또렷이 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무력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나의 외할머니. 그리고 한 사람의 딸이자 어머니였고, 누군가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모든 이에게 따스했던 분. 내가 알지 못했던, 아니 영원히 알 수 없을 외할머니의 또 다른 모습들. 젊은 시절의 기쁨과 슬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오늘, 마지막 숨결과 함께 저물어 갔다.
한 사람의 온전한 일생이, 시간이라는 강물 속으로 조용히 스러져 갔다. 마치 오래된 사진이 바람에 날리듯 붙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사라져 간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일생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면, 이 상실의 고통이 조금은 덜할까.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빈자리는 더욱 시리게 아프다. 끝이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워야 할 순간들. 왜 아직은 아름답기보다는 아픈 상처로 남는 걸까.
어쩌면 이 아픔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까? 그래서 더욱 견디기 힘든 이 순간이,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간절하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소중한 것들이 영원하길 바란다.
잊혀지기엔 너무도 찬란했고, 잊히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삶과 기억이다. 이 긴 밤도, 할머니와의 기억처럼 쉽사리 잊힐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