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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간사하지

매력

by 핸드스피크

‘사람은 참 간사하지’ 요즘 이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2년간의 제주 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몸도 마음도 쉽게 지쳐버렸다.

크게 잘못된 일은 없었지만,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사소한 일에도 스트레스가 쌓였다.

아마 몇년 전부터 조금씩 축적되어온 것들이 이제서야 한계에 닿은 걸까.


사람을 좋아해서, 소중한 관계를 잃고 싶지않아서, 애써 맞추고 이해하려 했던 시간들.

결국, 그런 것들이 나를 가장 지치게 만든 이유가 되어버렸다.


제주에서는 너무나 당연하듯 편안했고, 여유로웠던 것들이 서울에 와보니 문득 그리워졌다.

물론 외롭기도 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도 나는 내 속도를 지킬 수 있었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일상이 가장 그리웠다.


복잡한 관계도, 과한 기대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맞춰야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조용히 숨 쉴 수 있었던 곳.

외롭고 답답할 때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 바다를 보며 러닝을 하고, 자연의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시간들 사이, 나는 다섯 군데의 청소 알바와 고깃집 알바까지 하며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정신없이 바빴고, 육체적으로는 분명 지칠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이 고되다 못해 뻗는 날도 있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만큼은 불필요한 생각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더운 날엔 바다에 가서 시원하게 다이빙을 즐기고, 쌀쌀한 날엔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연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듯한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쫒기듯 움직였던 서울과는 다르게, 제주에서의 바쁨은 나를 살아 있게 만들어줬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느꼈다.


‘아, 좆됐다.’


낯선 것도 아닌데, 낯설고. 익숙해야 할 공간인데, 숨이 턱 막히고. 사람들 속에 있는데도, 외로웠다.

제주에선 하루가 순하게 흘러갔는데 서울은 하루를 버티는 게 일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힘든가, 돌아온 이유조차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


생각대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들의 관점과 의견은 하나같이 나와 달랐다.

하필이면 타이밍도 좋지 않았던 걸까.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들,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것들이

결국 터져 나와 내 숨을 짓눌렀지만, 나는 그저 현명하게, 지혜롭게 이겨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속도를 감추고 괜찮은 척, 여유로운 척, 그렇게 버텼다.

조금만 더 참고 노력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자꾸만 뒤로 미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주에 있었던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서, 너무 극과 극의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심한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다. 몸은 서울에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제주의 바다와 숲,

그리고 햇볕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더 힘들었다.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를 잃은 것 같은 공허함.


무력감에 마치 방 안에 갇힌 사람처럼 불도 켜지 않은 채, 폰을 켜 앨범을 뒤적이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제주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조용히, 깊이 받고 있었는지를.

앨범엔 제주에서 오래 일했던 게스트 하우스 ‘게으른 소나기’의 마당에 검은 고양이 두마리 돼지와 루카,

그리고 바다, 산, 풍력발전기 사진이 전부였다.


일하러 갈 때마다 돼지와 루카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당에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그 조용한 환영이 말 없는 위로가 되었고, 나는 그 작은 존재들로부터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서, 잊고 싶지 않아서, 그 순간들을 사진과 영상을 차곡차곡 남겨두었다.

제주에서 외롭거나 힘든 날이면, 이상하게도 돼지와 루카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 따라 유난히 내 옆에 찰싹 붙어 있거나,

계속해서 울어댔다. 그 위로 같은 애정이 너무도 따뜻했다. 조용했지만, 참 분명했던 위로의 시간들.


내가 제주에서 씩씩하게 잘 살아낼 수 있었던 건, 그 안에서 나를 감싸주던 온기 덕분이었다는 걸.

일하러 갈 때마다 반겨주던 돼지와 루카, 집 앞에 펼쳐진 넓은 바다와 하늘 그리고 언제나 조용히 돌아가던 풍력발전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늘 내 곁에 있어주었다. 그것들이 내 원동력이 되어 나는 매일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었고,

돼지와 루카에게서 위로 같은 사랑을 느끼며 조용하고 단단한 에너지를 얻고 있었다는 걸.


잠이 오지 않는 새벽 3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나는 결국 제주행 티켓을 예매했다.

잠도 자지 않은 채 그대로 짐을 챙겨, 제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놀랍게도, 몸보다 마음이 먼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늘 찾던 카페에 들러 글을 쓰고, 가장 좋아하는 김녕 바다를 보며 한참 멍을 때렸다.

함덕의 서우봉에 올라 땀을 뺐다. 그렇게 하루를 채우고, 다음 날엔 오랜만에 돼지와 루카를 만나러 ‘게으른 소나기’ 를 찾았다.

역시나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초록잎들이 가득한 그 마당.

단잠에 빠져 있던 돼지와 루카의 이름을 부르며 살며시 깨웠다.

비몽사몽한데도, 내가 반가운지 비틀비틀 천천히 걸어나와 밖으로 향하는 모습이 세상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따뜻한 햇볕 아래, 소나기 사장님과 잔디에 앉아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제주에 있는 동안 행복할 수 있었던 건요,


알바 덕분에 매일 부지런히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일하면서 돼지와 루카도 매일 마주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 안에서 위로를 받고, 조용히 에너지를 얻고 있었던 거예요.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얻고 있었다는 건

최근에야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그래서 제주에 살던 시간들이 행복했고, 좋았고, 편안했구나... 라는 걸요.


역시 사람은, 없어봐야 비로소 그때의 소중함을 더 깊이 알게 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보고 싶었고, 꼭 다시 오고 싶었어요.”


기분 좋은 위로와 에너지를 안고 돌아오는 길, 다시 한 번 떠오른 말.

‘사람은 참 간사하지.’


사람은 참 간사해서,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리워하고, 결국 또 돌아온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제주라는 향수병에 걸렸다.

하지만 다행인 건, 그 간사함 덕분에 다시 돌아갈 이유가 생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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