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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g Lee Nov 23. 2021

아홉 살에 엄마가 돌아가시면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

K장녀인 내가 어려서 엄마를 잃고 겪은 일들

엄마가 돌아가신 건 97년이다.

내가 88년생이니까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10년을 채 못 사시고 돌아가셨다.

사인은 유방암이었고, 늦게 발견한 탓에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독한 항암치료도 두 가슴을 다 절제하는 수술도 소용이 없었다.

중국에 출장을 가 있던 아버지는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고,

어렸던 내가 들은 엄마의 마지막 말은 "아빠한테 삐삐 좀 쳐줘"였다. 생사를 오가며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엄마는 그 말만 열 번은 넘게 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엄마는. 정말로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던 그 말은 대체 뭐였을까.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을 암 발병 전의 엄마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서 119로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너무 위험할 것이라는 판단에 병원에 의사 왕진을 부탁하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직접 가서 부탁이라도 해보자고 가는데 아이가 가서 엄마를 살려달라고 하면 의사가 그래도 오지 않겠냐고 나를 데리고 가라고 누가 그래서, 어느 병원에서 삼촌이라 부르던 아저씨가 제발 가서 주사 한 번만 놔달라고, 쇼크가 왔는데 남편도 못 보고 갈 수는 없지 않냐고 의사에게 빌던 중에 옆에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구급차를 타고 의사와 함께 돌아왔는데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다. 임종을 못 지킨 건 나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빨리 엄마 살려주러 가달라고 울고불고 부탁이라도 해볼걸, 그러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을 거였으면 대체 나는 왜 거길 따라간 걸까. 이미 돌아가셨다는 엄마의 손은, 뛰어가 안긴 가슴은 온기가 여전히 남아 따듯했고 나는 그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잠든 것 같은데. 깨워도 못 일어나는 것뿐인데.


하지만 내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고 와는 관계없이 엄마는 영안실로 옮겨지고 나는 검정 원피스가 입혀져서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다음날에 아버지가 장례식장으로 왔고, 나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날 처음 봤다.


부고를 듣고 온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른들은 엄마 영정사진보다 날 보며 더 우는 데다가 불쌍하다는 말을 백번쯤 들은 것 같다. 3일장을 치르는 중 어느 날은 답답해서 장례식장 밖에 나가 주차장을 서성거렸는데, 지나가던 또래의 아이들이 "야 쟤 뭐야 무슨 공주병인가 봐, 리본까지 달았네" 하고 비웃으며 지나간 장면이 이상하게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아마도 그 장면이 앞으로 시작될 일들의 복선 같은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상 중이라서 입은 검은 원피스가 유난히 레이스장식같은게 있긴 했다. 머리의 리본은 상주들이 꽂는 흰색 머리핀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비웃음을 산 그 장면은 분명 그 앞으로를 보여주는 복선이었다.


시신을 염하며 영안실 냉장고에서 나온 차디찬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어도 봤지만, 나는 그래도 엄마의 죽음을 잘 실감하지 못했다. 3일장의 마지막에, 엄마의 관이 파 놓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 순간에 "너는 이게 엄마하고 마지막인데 슬프지도 않니" 하던 아버지의 말에 비로소 눈물이 났다. 엄마하고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어서, 엄마 바로 윗 형제인 이모의 우는 소리가 너무 슬퍼서 나도 울었을까. 마지막이라는 말이 그냥 슬퍼서 울었을까. 슬픈 장면이고 다들 엄마가 죽었다고 하는데 도대체가 현실감이 들지가 않아서, 울면서도 나는 내가 왜 우나 싶었기도 했다.


장례식이 다 끝나고 며칠쯤 뒤에 나는 다시 등교를 시작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은 내가 아는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그 나이는 누군가의 죽음을 대하기엔 어찌나 잔인하던지. 내가 울지 않으니까 "쟤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데 울지도 않네, 진짜 이상해" 라며 수군거리고 어쩌다 웃기라도 하면 "엄마 돌아가셨다면서 웃음이 나오나, 소름 끼치지 않냐?"는 말을 들었다. 괜찮냐며 다가오는 아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괜찮다는 대답은 그 애들이 원하는 대답은 분명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엄마가 잠깐 어디 간 것만 같은데 뭐가 그리 슬퍼야 하고 하루 종일 울고만 있길 원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왕따가 되고,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반의 중심에 있던 나였는데, 상황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갑작스레 내 이름을 잃고 '엄마 없는 애'라는 그들이 모르는 미지의 존재쯤으로 전락했다.


여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지내다가 우리는 겨울에 시골로 이사를 갔는데, 나는 거기에서 엄마가 없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쩌다 엄마에 대해 묻는 아이가 있으면, 엄마는 잠깐 미국에 갔다고 거짓말도 해가며 엄마의 부재를 숨겼다. ,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5학년 때 우리 반에는 반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공책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들, 하지만 말하기엔 쑥스러운 그런 말들을 그 공책에 써주라고 걸린 공책들. 그 공책 중 하나에 어느 날 누가 욕설과 비난을 몰래 써놓았고, 담임교사는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추궁했지만 아무도 자기가 했다고 나서지 않았다.

몇 시간을 반 전체가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손을 들고, 눈을 감고 조용히 지금이라도 말하면 용서하겠다고 갖은 협박을 했지만 그래도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지치고 범인에 대한 증오가 한계치까지 올라갔을 때 즈음에  글씨체를 감추려는 듯 왼손으로 쓴 듯한 그 욕설 글을 필체를 확인해서 범인을 찾겠다며 담임교사는 모두에게 칠판에 왼손으로 글씨를 쓰게 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나였다. 글씨체가 내 것과 가장 유사하다며. 나는 아닌데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책상 위에 몇 시간째 무릎 꿇고 있는 반 아이들의 그 비난의 시선이 나에게 모두 몰린 그 순간 담임교사가 말했다.


"너 그거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순간에 술렁대는 분위기. "쟤 엄마 미국 갔다고 그러지 않았어?"

이쯤 되니 내가 안 한 일도 마치 내가 한 건가 착각이 들었다. 나 정말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저기에 욕을 쓰기라도 한 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한 친구에게 그때의 범인이 누구였는지 들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나와 친하게 지내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 그 애는 그날 하굣길에 다른 친구에게 "아 그거 내가 그런 거였는데 안 들킴ㅋㅋㅋ" 하고 웃으면서 집에 갔었다고,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그냥 조용히 그 애의 연락처니 뭐니 그냥 싹 다 지우고 차단했다. 그 담임교사는 여전히 교사로 일할까? 그날을 기억이나 하려나.


앞으로 나는 어디서든 행동을 잘해야 '엄마가 없어서 저런다' 소리를 안 듣는 거라고, 너는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말을 주변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들었다. 옷도 더 깨끗하게 입어야 하고, 몸가짐도 더 단정해야 하고, 공부도 더 잘해야 하는 거라고. 매일 날 가르치고 챙겨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는데, 더 잘 해내라니.


나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제 집안에 여자는 너뿐이니까 네가 동생도 아버지도 잘 보살펴야 한다고 했다. 집안에서 엄마 노릇은 네가 해야지 하면서. 보살핌을 받던 아홉 살이 무슨 수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지 자세한 건 알려주지도 않고서.


집에 찾아온 어른들은 집이 방음이 잘 안 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방 창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창나이에 애들이 둘이나 딸려가지고 재가도 못하고 어쩌냐", "외할머니랑 같이 살았다면서 애들은 그쪽에 보내지 왜 저러고 있대" 같은 소리를 하기 일쑤였고,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나는 늘 내가 아버지의 짐짝 인양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


아버지의 지인이나 친구들은 걸핏하면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고 나에게 "너 아빠 새엄마 생겨도 괜찮지?"라는 말에 대답을 들으려고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엄마를 잃은 것을 내가 제대로 인지한 것은 사실 몇 년은 지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아, 엄마는 정말로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게 맞는구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쯤 지나고 한밤중에 갑자기 그 의미가 훅 와닿아서 이불속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전까지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꼭 엄마가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거든.


슬퍼하고 엄마를 추모하기에 바빠야 했던 그 시간에 나는 주변의 압박에 시달리기에 바빠서 더 그랬던 건 아닐까. '엄마가 없으니까' 어른스러워야 하고, 동생도 내가 잘 돌봐야 하고, 집안일도 알아서 잘해야 하고,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라도 생기면 두 팔 벌려 환영해한다는 K장녀로 한부모가정에 대한 편견에 치이면서 자랐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홉 살에겐 참 가혹한 일들이었다.

또래도, 그리고 어른들도 모두가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 환경에서 쓸데없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잔뜩 지고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도 한참을 고생했다. 

 

그때는 한부모가정이라는 용어도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그런 용어도 있고 지원 정책들도 있다는 요즘은 이런 일들이 덜 벌어질까?  

가족의 형태의 다양성을 그것대로 인정하고, 불쌍하고 특이하고 달라야 하는 존재로 규정짓지 않는 그런 사회 었다면 나는 지금쯤 조금은 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어 있으려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바뀐 것은 엄마의 빈자리나 엄마를 잃어 슬픈 나의 마음보다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더 확연하고 직접적이었다.


주변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위로는 하더라도 특별하게 대하지는 말아주세요.

그 사람은 슬플지언정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영원히 슬퍼하고 하루 종일 울고 있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엄마가 없다는 것은 내게 치부가 아니니 그걸 물었다고 미안하단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매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이 글을 보는 분들은 그 부분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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