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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caa Nov 25. 2021

다산의 공감 연습(3장)

3장 군자의 그릇/군자불기君子不器

공자는 자공을 안자(안연)顔子에게 견주어 누가 더 나으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그 기대가 컸던 것이다. 마땅히 여기에 하나의 그릇[器]으로 다시 폄하해서는 안 된다.

孔子以子貢擬於顔子。問其孰愈。則其期許大矣。不應復以一偏之器貶之。《논어고금주》


비록 공자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자공을 ‘그릇’이라고 평가했지만, 왕조의 제사에 쓰이는 가장 귀한 그릇이라고 평가했다는 점에서 군자에 매우 근접한 수준으로 보았다고 정약용은 판단한 것이다. 정약용이 왜 이토록 자공을 옹호한 것일까? 


충성심[忠]이 강조되었던 성리학 전통에서 증자에게 전수된 공자의 충서忠恕는 결국 충忠 한 글자로 수렴되거나 충효忠孝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정약용은 <이인>편 15장을 해석하면서 충서는 공자철학의 정통성을 가리키는 도통道統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핵심개념은 서恕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리고 자공을 안연과 맞먹는 거의 유일한 제자로 평하는 까닭은 공자가 서를 직접 전수한 제자가 바로 자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자공에게 서를 전수해 주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공은 상인 집안 출신이다. 상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상호 신뢰다. 상호 신뢰를 충과 비슷한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충은 군주와 신하 또는 군주와 백성 같은 수직적 관계에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상인들은 수평적 관계이므로 공자는 그에게 서를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서 춘추 시대 다른 문헌에서 서가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춘추 시대의 학문에서는 정치적 관계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관계에 더 집중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공에게 서恕를 전수해 줌으로써 수평적 관계에서 인仁을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서양문화와 충돌하여 봉건제가 종말을 맞이할 것을 예감한 정약용은 다시 공자의 서에 다시 주목했다. 이것은 2000년간 충효가 강조된 유교 전통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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