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세상 Jan 02. 2024

탈 진실의 시대

  진실을 찾는 것은 가능한가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이라 독자들에게 좀 밝고 희망적이고 즐거운 얘기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처한 환경과 조건 탓에) 마땅한 책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고  며칠을 망설이다 그냥 전에 써 놓은 책 소개 글을 올립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오늘 산책길에 나섰다가 만난 이웃 가족이 큰 소리로 내게 보낸 새해 인사가 갈피를 잡지 못한 듯 공연히 불안하던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기에 여러분에게도 그 인사를 전합니다.

                             Bonne année


2016년 미 대선 전후 벌어지는 <트럼프 현상>은 미국의 많은 학자들에게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 이론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것 같다. <트럼프 현상>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나와 내편의 신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현상이 크게 성행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말한다. 한국에서도 지난 대선 전후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 객관적 사실에 대해서조차 내편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부인하고 음모론으로 진실을 덮어버리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이념 혹은 감정이 실제 현실, 객관적 사실, 진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원리가 무엇일까?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뿐만 아니라 뇌 과학자, 진화 생물학자, 사회 심리학자까지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저술들을 내놓고 있다. 인간의 뇌가 기본적으로 인식의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했다는 이론도 있고 인간은 자기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위해 객관적 사실에 눈감을 수도 있고, 확증편향이 이를 더 부추긴다는 이론도 있다.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가 쓴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라는 책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저술된 책이다. 지금의 현상을 탈-진실 즉 진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적 현상이라고 보고 그 현상의 기원과 메커니즘을 밝히려고 한다. 나아가 이 현상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자가 누구인가, 그 현상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탈-진실의 시대에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탈-진실이라는 단어는 2016년 영국 브렉시트 투표와 미 대선 기간 사용 빈도수가 급증했다. 이에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이 단어를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고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 공공의 견해를 형성하는데 객관적 사실 보다 개인의 신념과 감정에 더 호소하는 성향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말.]

여기에서 post라는 단어는 '이후'라는 시간적 의미보다 '가려진, 어둠에 싸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탈-진실은 단순히 사실을 잘못 알고 말하는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에는 사실 여러 층이 있는데, 1) 의도적 무지; 정보가 불충분하거나 부정확한 줄 알면서도 이를 확인하려는 노력 없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 이런 경우 이 주장을 한 사람은 그의 게으름에 대해 일정한 책임이 있고 비난받을 수 있다.

(원희룡장관이 양평군 도로 종점 변경과 관련해 처음 보여 준 신념에 찬 태도-노선 변경안이 양평군에서 제출한 것이라는-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2) 의도적 속임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인 뉴트 깅그리치가 CNN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범죄율이 감소했다는 FBI의 통계를 한 편(너희 편)의 진실이며, 범죄율이 치솟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한편(나의 편)이 느끼는 진실이라고 강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실을 정치적으로 돌려 말함으로써(political spin) 대중의 판단을 흐리고 마치 논쟁적 요소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행위이다. 

(좋은 예로 한동훈의 여러 응답을 들 수 있는데 가장 최근의 예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써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 위원장은 국민의힘이 검사들에게 장악된 당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검사는 정의롭고 시민의 수호자라는 엉뚱한 대답으로 논점을 숨기고, 검사를 사칭한 이재명 대표를 최고 존엄으로 모시는 민주당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통해 대중의 관심과 논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고 시도했다.)

3) 탈-진실의 가장 독소적인 형태는 자기기만과 환상에 의해 모든 믿을 만한 자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도 진실이 아닌 것을 실제로 믿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대중의 반응이 거짓에 대한 사실 자체를 바꿀 수 있다(즉 거짓이 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재선 실패 후 선거가 부정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그를 지지하는 대중에 의해 그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의사당 난입에 이르는 과정)

(윤 대통령의 '바이든'- '날리면' 논쟁은 '날리면'이라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을 제공해 보도 내용을 논쟁적인 문제로 만든 것을 넘어, 보도한 기자와 방송사를 공격하고 위협하여 트럼프보다 더 직접적이고 거친 방법으로 자신들의 대안적 사실을 지배적 사실로 만들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이러한 탈-진실이 행해지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기 위해 과거 거대 담배회사들이 암 환자들의 소송에 대항해 이용한 방식, 기후변화에 대한 거대 석유재벌들의 대응 방식,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나 진화론을 부정하는 종교적 집단 지도자들이 취한 방식들을 사례로 든다.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부정하려는 역사 속의 집단과 시도들에 대한 저자의 연구는 <과학을 부정하는 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지구 편평론자들, 기후위기 부인자들, 그리고 이성에 도전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있다.) 


이들이 취한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객관적 증거를 부인하는 다른 입장을 주장한다.

담배회사나 오일 회사들은 기금을 모아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재단을 설립한다. 이 재단에 소수의 과학자들을 소속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기존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 문제제기가 얼마나 과학적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목적은 담배가 암을 일으킨다든지, 화석 연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든지, 자연 세계가 진화의 과정을 밟아왔다든지 하는 과학적 연구에 대해 사실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대 의견을 냄으로써 논쟁이 있다는 것을 주지 시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까운 예로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덮기 위해 막대한 기금을 하버드대등 유수의 대학과 학자들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매우 빈약한 증거에 기초한 <위안부 자발적 매춘설>에 관한 논문 등을 발표하게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2.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달라진 대중 매체의 환경을 최대한 이용해서 논쟁을 확산시킨다.

이 과정에서 주요한 전술은 1) 공평성과 균형을 언론매체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보도에 있어서 당파성이 아닌 객관적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널리스트들은 보도의 ‘객관성’을 ‘같은 분량의 시간’을 할애하고, 심지어 사실관계에 대해서 조차 ‘양쪽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핵 오염수의 유해성에 대해 ‘양 쪽의 입장’을 ‘균형 있게’ 보도하는 매체들을 떠 올려본다. 핵 오염수를 걸러서 바다에 방출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어떤 과학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을 동등하게 노출시킴으로써 그 주장이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대중이 인식하게 만든다. 혹은 적어도 오염수 방출의 위해성에 대해 '논쟁'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여기에서 저자는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저널리즘의 목표인 객관성은 진실과 거짓에게 동등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드러나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론매체가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주장으로 ‘진실을 보도하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는 그것을 노리는 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기자들이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탐사보도를 기피하거나 포기하고 '양쪽'의 주장을 공평하게 되풀이해 주는 양태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는 기자들의 '게으름'과 '사실'보다 '빠른 뉴스'를 선택하는 이익추구형 매체들의 속성이 결합된 것이라고 하는 저자의 비판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정보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압력이 자주 소수에 불과한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확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중립성 그리고 ‘균형’이 언론의 ‘팩트 체크’ 역할을 대신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 결과 전통적 매체들은 양쪽으로부터 외면받고 신뢰성 자체가 땅에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2)전통적 매체들의 하락과 함께,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성장한 소셜 미디어를 한껏 이용한다. 

미국 사회에서 소셜 미디어는 이제 전통적 미디어를 대체하고 있다. 미국 성인의 44%가 페이스 북에서 뉴스를 접한다는 통계가 말하여 주는 것은 뉴스 콘텐츠에 대한 검증과 사실 확인이 안 된 뉴스가 성인의 반 정도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 환경에서 '가짜 뉴스'문제가 발생한다.


가짜 뉴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거짓 뉴스가 아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거짓 즉 목적을 가지고 생성된 거짓뉴스이다.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한 미끼, 선정적인 뉴스에서 시작,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대중을 홀리는 거짓 뉴스로 성장한다. 대부분의 가짜뉴스 창조자들이 단지 경제적 목적을 위해서 했다거나 심지어는 사회적 실험을 위해 했다는 식으로 합리화하지만  가짜뉴스가 정치적 상황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가짜 뉴스에 의해 미국에서는 여러 가지의 폭력적이고 사회 안정을 해치는 행위들이 도발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트럼프가 총투표수에서 클린턴을 앞섰고, 우편 투표가 조작되었다는 가짜뉴스에 따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 의회 의사당을 공격한 사건일 것이다.

가짜뉴스가 이념적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생산될 때 그것은 바로 또 다른 ‘프로파간다(선전 선동)’로 간주할 수 있다. 프로파간다는 단순히 거짓뉴스를 믿게 만드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파간다는 결점투성이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의 목적은 단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기 위한 시도이다. 지지자들을 묶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결국 권위주의-전체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프로파간다의 목적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 그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력이 실로 강력하면 현실 자체를 부정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은 정치적 통제의 첫 발을 떼는 것이다. 

(바이든 -날리면 보도를 둘러싼 윤 정부의 행위는 정확히 가짜뉴스를 통해 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그 진실 자체를 통제하는 힘을 과시하는 행위로 나간 권위주의 정치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거짓말이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면 권력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길로 더 나가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탈-진실의 관념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선전 선동을 낳았고 그것이 권위주의-전체주의로 나가게 되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저자는 이 탈-진실이라는 관념이 포스트 모더니즘으로부터 나왔다고 본다. 

문학의 해체주의(어떤 작품을 이해할 때 작가의 본래 의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분해하고 고찰함으로써 그 작품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역할을 알아내고자 하는 이론)에서 시작해 예술과 철학과 사회학의 사회적 구성주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객관적 현실' 혹은 '하나의 절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관점과 경험에서 본 현실과 의미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진실도 그 진실을 주창하는 사람의 정치적 이념의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진실을 믿도록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억압이 될 수 있다. 권력을 가지게 되면 진실을 통제하게 된다.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를 우기는 것은 일종의 파시즘이다(관점주의 perspectivism).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 관점주의를 정치적 지도자들이나 종파의 지도자들이 명백한 과학적 증거나 현실을 부정하고 대중을 선동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과학의 객관성'조차도 부정하는 탈-진실의 시대를 만든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권력으로부터 진실을 해방시키고 '하나'의 진리를 강요하는 억압적 기성체제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였는데 그것이 과학과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탈-진실의 시대, 가짜뉴스를 강요하는 거짓 선동과 권위주의적 권력을 추구하는 세력에게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칼 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이라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자연 과학자들 사이에서 절대적 진실과 객관성을 부인하는 사상적 기류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제기되었다. 


아카데믹 자유주의는 오랜 세기 과학과 이성의 편에 서 왔다. 그러나 저자는 현대의 상아탑 속의 인문주의자들은 약자들을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을 평가절하하고, 증거에 기반한 사고들을 무력화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해 모든 학문의 영역에 퍼진 ‘현실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론화 작업(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은 에이즈의 치료약을 발견하거나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거나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진실과 거짓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면 역사, 사회학, 경제, 정치 속에 존재하는 거짓된 사고, 생각과 싸울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제 상아탑 속의 학자들에게 포스트 모더니즘을 버리고 '인간의 삶을 위한 현실'에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탈-진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탈-진실에 대항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은 ‘거짓 균형’이라는 관념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그다음엔 뉴스가 통용되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페이스북이나 구글이 가짜뉴스를 억제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고 있지만 효율적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더구나 특정한 스폰서를 등에 업은 사이트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해도 개개인의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를 막아낼 도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런 시스템에서는 차라리 실제뉴스로 덮어 버리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우리 각자 객관적 사실을 퍼트리기 위해 더 열심히 SNS를 하라는 말?!)


탐사보도 전문 매체들- 원천이 있는, 검증된, 증거에 기반한 뉴스를 제공하는 기관들을 지원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소스가 불분명한 공짜 뉴스를 보는 대신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를 구독하는 것이다.(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미 이런 인식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2016년 이후 빅뉴스 잡지들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통계, 논리, 합리적 이해에 중요한 훌륭한 추론 등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


디지털 세계에서 가짜뉴스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의 소스가 무엇인지, 그 소스의 주인이 그 아이템에 전문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해당 뉴스가 기본적인 상식과 자신의 경험에 부합한 것인지 등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개개인의 노력이 중요한 것은 탈-진실과 가짜 뉴스가 인류의 보다 나은 삶과 미래의 희망을 여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은 있는데 그것을 제거할 다른 제도적 정치적 수단이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대중이 흔들리거나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권력이 강화되는 길을 열어주지 않도록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가짜 뉴스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에는 언론학자인 정준희교수의 주석이 달려 있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 책을 읽지 못했는데 한국의 탈-진실, 가짜뉴스의 상황에 대한 정교수의 날카로운 분석이 함께하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훨씬 더 해질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대량 파괴 무기-수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