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살펴 성인에 이르고, 백성을 이롭게, 조선의 대담한 지성
강릉을 상징하는 지성의 정점에 율곡 이이가 있다. 흔히 화폐 속 인자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그는 사실 안온한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던 가장 치열한 비판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예언적 개혁가였다.
율곡은 명종 시대,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의 삼남(셋째 아들)으로 외가댁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6세까지 이곳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의 학문적·예술적 토양이 되었다. 3세에 석류를 보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시를 지었으며, 5세에는 경포대의 장엄함을 보고 “하늘이 바다를 삼켰다”는 웅장한 기개의 《경포대부》를 남겼다. 그는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웠는데, 이는 당시의 경직된 교육 문화를 넘어선 가학(家學)의 정수였으며 훗날 그가 권위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를 갖게 된 뿌리가 되었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며 천재성을 증명했지만, 16세에 닥친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거대한 실존적 고민으로 몰아넣었다.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로 향했던 길에서 돌아온 후 3년상을 마친 19세의 율곡은 돌연 금강산으로 입산하여 승려가 된다. 유교 사회에서 예비 사대부가 출가한다는 것은 파문을 각오한. '이단아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하산하며 하조대에서 조선의 건국을 꿈꾸었던 하륜과 조준을 생각했을 것이다 . 이 4년의 방황은 그에게 '관념 속에 갇힌 유학'이 아닌,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실천적 철학'을 선물했다.
29세에 식년 문과 장원을 포함해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한 '구도장원공' 율곡은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한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그는 오늘날의 감사원장(사헌부 대사헌), 인사혁신처, 법무·국방·행안부 장관(형조·병조·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잘못된 정책 앞에서는 임금에게조차 직언을 서슴지 않는 독설가였다. 동서 분당이 시작되던 시기에 당파 간 갈등이 국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며,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하고 당파를 초월한 국정 운영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간언하였다. 언제든 벼슬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는 스스로를 '잠시 머무는 나그네'로 여겼고, 퇴직 후에는 머물 집조차 변변치 않을 만큼 청빈했다. 이는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스스로 세운 도덕적 원칙을 끝까지 지켜낸 '초인(Übermensch)'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 이황의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독창적 세계관을 완성했다. 이는 현실의 가변성(氣)을 중시하는 철학으로, 그가 십만양병설, 토지개혁, 동호문답과 같은 현실적인 개혁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특히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대장간을 세워 농기구를 직접 만들어 보급한 대목은 놀랍다. 이는 성리학자가 노동과 기술의 가치를 직접 실천한 '탈주류적 행보'였다.
강릉에는 율곡의 성장이 깃든 세 명소가 있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평온한 천재성을 꽃피웠던 오죽헌, 자연의 거대함과 포용성을 마주하며 호연지기를 키웠던 경포대, 그리고 삶의 방향을 성찰하며 국가와 백성을 위한 길을 다짐했을 것으로 전해지는 하조대이다. 오늘날 우리가 율곡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온화한 영정 때문이 아니다. 낡은 관습을 부수고(격몽요결),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계하며(자경문), 나라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미움받을 용기를 냈던 그의 '급진적 지성'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릉의 이 세 곳을 거닐며, 우리 역시 마음속의 구습을 혁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율곡'이 되보길 다짐해 보는 것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