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학이시습 길
조선 문학사의 독보적 거장 김시습은 시작부터 비범했다. 훗날 강릉을 빛낸 율곡 이이나 허균보다 앞서, 그는 이미 5세에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어 '신동'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천재였다. 서양의 모차르트가 5세에 작곡을 시작해 세상을 놀라게 했듯, 김시습의 재능은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다. 세종은 그의 재주를 귀히 여겨 직접 비단을 내리며 국가의 동량으로 키우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천재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5세 무렵,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과거 낙방은 그를 깊은 방황의 길로 이끌었다. 이는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으로 향했던 율곡의 고뇌와도 닮아 있으나, 김시습에게는 세상의 불조리와 마주하기 전 겪은 처절한 예성(豫成)의 통과 의례였다.
김시습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세조의 왕위 찬탈이었다.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21세의 청년 김시습은 통곡하며 읽던 모든 책을 불태웠다. 그는 화려한 관직의 미래 대신 승려가 되어 산으로 들어가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과 달리, 그는 살아서 끝까지 세조에게 저항한 '생육신'으로 일컬어진다. 전국을 떠도는 방랑의 세월 속에서도 조정은 그의 천재성을 아까워하며 수차례 관직에 들어오라는 요청을 보냈으나, 그는 똥통에 빠지거나 미친 척을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불의한 권력과는 결코 한 하늘 아래 서지 않겠다는 강직한 지조는 지식인의 사표가 될 만하다.
그는 정착하지 못하는 구름처럼 관서와 호남, 관동의 명산대천을 누볐다. 금강산의 장엄함과 경주의 고즈넉함을 가슴에 담으며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을 시와 글로 기록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여행기는 단순한 지리적 기록을 넘어, 길 위에서 만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인문학적 보고였다. 강릉의 소나무 숲길과 대관령의 굽이진 길 위에도 그의 발자취는 짙게 남아 있으며, 이는 현재 강원대학교 강릉 캠퍼스를 따라 조성된 '학이시습길'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교토의 '철학자의 길'처럼, 이 길을 걷는 이들은 시대를 고민했던 한 천재의 고독한 산책을 공유하게 된다.
말년에 경주 금오산에 머물며 집필한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는 그의 문학적 결정체다. 귀신과 인간의 사랑, 용궁과 저승의 체험 등을 다룬 이 이야기는 당시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용납되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그 기이한 환상 속에는 단종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과 현실 정치에서의 답답함을 풀어내고자 했던 그의 간절함이 서려 있다. 현실에서 가로막힌 정의를 소설 속에서나마 구현하려 했던 그의 상상력은 훗날 허균이 《홍길동전》을 통해 이상향을 꿈꿨던 서사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판타지 콘텐츠는 현대에 이르러 드라마와 소설로 변주되며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김시습은 학문의 경계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유교의 지조, 불교의 자비, 도교의 무위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유불선 통합론'을 주장하며, 만물의 근원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깊은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사상 중심에는 늘 '백성'이 있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며,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는 권력은 정당성을 잃는다는 그의 민본 철학은 시대를 앞서간 민주적 사유였다.
김시습의 인생 궤적은 강릉을 대표하는 다른 지성인 율곡 이이, 허균과 묘하게 겹쳐진다. 그는 강릉 외가에서 자라며 어머니로부터 깊은 학문적 감화를 받았으나, 15세에 어머니를 여의는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이는 훗날 율곡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던 방황의 전조와도 같다. 세조가 단종의 권력을 찬탈하자 공부하던 책을 불태우고 승려가 되어 산으로 들어간 행보는 율곡의 입산과 닮아 있으면서도, 끝내 현실 정치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처절했다.
또한, 세상의 권력자를 거침없이 비웃고 백성을 위한 시를 쓴 점은 허균의 혁명적 기개와 맞닿아 있다.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통해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환상적인 서사로 풀어낸 것은, 훗날 허균이 《홍길동전》을 통해 이상향인 율도국을 꿈꿨던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김시습은 가히 강릉 지성의 '원조'라 불릴 만하다.
천재로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고독한 자유 영혼으로 살았던 김시습. 그의 정신은 강릉의 기념관과 그가 머물렀던 장소들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는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관철했던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강릉에 온다면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길 권한다. 학이시습길의 바람 소리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한계를 짓던 마음을 허물고, 시대를 앞서 살다간 용감한 거장의 숨결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정신은 지금도 강릉의 지성을 지탱하는 뿌리가 되어 새로운 세대의 김시습들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