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장, 지성을 깨우고 선(善)을 나누는 사회적 책임

선교장을 찾은 인사들, 김정희와 여운형

by Clara Shin


선교장은 강릉이라는 공간이 지닌 지성과 개방성, 그리고 나눔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다. 조선 숙종 재위기인 1703년,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 족제비를 쫓아가다 지금의 터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전설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그러한 서사가 이곳의 ‘명당’ 이미지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이후 아들 이범중이 안채를 짓고, 손자 이후에가 동별당과 활래정을 세우면서 선교장은 점차 영동 지방을 대표하는 사대부 가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선교(船橋)’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이 공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에는 경포호수가 집 앞까지 들어와 있었고, 배를 이어 만든 다리를 건너야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다리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연결’과 ‘소통’을 떠올리게 한다. 선교장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과 지식이 드나드는 열린 장소였으며, 마치 항구처럼 다양한 흐름이 모이고 흘러가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개방성과 지적 전통은 강릉이 오랫동안 품어온 사상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율곡 이이가 강조한 경세제민의 정신, 즉 학문을 통해 사회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고자 했던 실천적 태도는 선교장의 나눔 문화 속에서 구체화된 모습으로 이어졌다. 또한 허균이 보여주었던 혁신적인 시각과 외부 세계를 향한 열린 태도 역시 선교장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사상과 사람이 교차하는 지적 토양이었다.


1816년에 건립된 활래정은 이러한 선교장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끊임없이 샘물이 흘러온다’는 의미를 담은 이 정자는 관동을 찾은 선비들이 반드시 들르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 선교장은 조선 후기 선비들에게 일종의 ‘버킷리스트’와 같은 공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관동 유람길에 나선 선비라면 한 번쯤 들러 활래정에 올라 시를 짓고, 당대의 담론을 나누는 것을 큰 의미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며 학문과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혔고, 그 과정에서 지역의 지적 수준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졌을 것이다. 활래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새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선교장은 또한 당대 문화예술의 흔적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가 강릉에 머무는 동안 이곳을 방문해 ‘홍엽거’라는 현판을 남겼고, 흥선대원군 역시 이곳에 머물며 ‘선교장’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이후 개항기를 거치며 서양식 건축 요소가 더해졌는데, 러시아 공사관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테라스 공간이 대표적이다. 전통 한옥에 서양식 구조가 결합된 이 장면은, 외부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해 온 선교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선교장이 보여준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다. 일제강점기인 1908년, 선교장 가문은 창고를 개조해 동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곳에는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방문하였고, 특히 몽양 여운형은 이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며 근대적 지식과 세계에 대한 시야를 전했다. 이는 단순한 교육을 넘어, 지식을 통해 시대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의 현장이었다.


결국 선교장은 하나의 오래된 집을 넘어선다. 이곳은 율곡의 실천적 지혜와 허균의 개방적 정신이 스며들고, 그것이 다시 나눔과 교육으로 이어진 공간이다. 여기에 더해 서양식 테라스의 도입처럼 외부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유연함까지 품고 있다. ‘배다리’라는 이름처럼 외부와 연결되고, 그 흐름을 지역의 자산으로 바꾸어 온 장소. 그래서 선교장은 지금도 강릉의 지적 전통과 공동체적 책임을 상징하는 ‘문화의 항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