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공민왕, 최치운
강릉은 고려라는 국가의 탄생부터 마지막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 왕실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문인들이 동경한 안식처였다. 사람과 유적의 흔적을 따라 고려를 넘어 조선으로 이어지는 강릉의 깊은 역사를 살펴본다.
고려의 개국과 '왕의 성'을 품은 도시
고려의 시작은 강릉의 호족 김순식의 결단과 함께한다. 신라 무열왕계의 후손으로 동해안 일대를 장악했던 그는 왕건에게 귀부하며 고려 건국의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다. 왕건은 그에게 자신의 성씨인 '왕(王)'씨를 하사했고, 김순식은 왕순식이 되어 후백제 정벌의 선봉에 섰다.
이 시기 강릉은 '동쪽의 서울'이라는 뜻의 동원경(東院京)으로 승격되었다. 오늘날의 부산에 비견될 만큼 국가적 요충지로 인정받은 것이다. 강릉 왕산면(王山面)이라는 지명은 왕건이 직접 하사했거나 왕씨 성을 받은 왕순식의 세력권이었다는 설을 통해 그날의 자부심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문인들의 풍류와 정신적 고향
고려 중기에 이르러 강릉은 학문과 예술이 꽃피는 문화의 성지가 된다. 그 중심에는 목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 이곡이 있었다. 그는 강릉의 산천을 유람하며 그 아름다움을 문장으로 남겼다. 이곡의 글은 당시 개경 선비들에게 강원도 유람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강릉이 단순한 군사 거점을 넘어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이들이 동경하는 '정신적 안식처'가 되게 했다.
국난 속의 안식처, 임영관과 공민왕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롭던 시기 강릉은 다시 한번 왕실의 품이 되어주었다. 피난길에 오른 공민왕은 강릉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당시 왕이 머물렀던 객사 임영관(臨瀛館)은 현재 국보 제51호인 객사문으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문에는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 현판이 걸려 있어, 왕과 강릉이 나누었던 깊은 유대감을 증명한다. 이어지는 공양왕 역시 유배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강릉 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고려의 마지막 장을 강릉과 함께 썼다.
'문향 강릉'의 설계자 최치운과 이율곡
고려의 학풍이 조선의 찬란한 유교 문화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 또한 강릉의 몫이었다. 그 중심에는 강릉 최씨의 시조 격인 최치운이 있다. 그는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기 법의학서인 《무원록》을 주석하는 등 실용 학문과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마련한 학문의 터전이 훗날 외손인 이율곡(이이)에게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본래 최치운의 아들인 최응현의 집이었으며, 가문의 학풍이 대를 이어 전달된 결과다. 최치운이 심은 학문의 씨앗이 율곡이라는 거목으로 피어남으로써, 강릉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진정한 '문향(文鄕)'으로 완성되었다.
강릉의 고려 역사는 '사람'이 만든 신뢰와 '유적'이 증명하는 위엄으로 가득 차 있다. 왕순식의 충절부터 공민왕의 필체, 그리고 최치운에서 율곡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혈맥까지. 강릉은 고려라는 거대한 서사시의 첫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그 전통을 조선으로 이어준 우리 역사의 보석이다.
그러므로 강릉에 방문한다면, 단순히 바다를 구경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이와 함께 강릉 곳곳에 서린 고려 역사의 흔적에 대해 꼭 이야기해 보길 바란다. 천년 전 이 땅을 지켰던 사람들의 자부심과 지혜를 나누는 시간은 아이에게 무엇보다 값진 역사 교육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