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내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눈을 떼지 않고 나 자신을 책 속으로 던져가면서 읽었던 글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그리도 하기 싫은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남들은 몰래 만화책을 읽을 때 나는 다양한 철학서들과 문학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자기 연민을 기반으로 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만 바라보는 그 자기중심적인 사춘기의 시절의 감성들을 문학책은 열심히 증폭시켜 주었고. 나는 어려운 문학과 철학을 읽는 특별함을 갖춘 사람이라는 자기도취에 빠져 살고는 했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부끄러운 감성을 나는 책 속 문장들을 통해서 승화시키고는 했다. 나는 글의 세계에 갇힌 채 어른이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군대와 사회라는 현실과 부딪혀가면서 나의 세계들이 무너지는 경험들을 하면서 내가 읽어왔던 글들을 버려나가기 시작했다. 글의 세계가 얼마나 연약한지.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몸소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으니. 내가 그렇게나 사랑해 왔고 좋아했던 글들로 내가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현실을 묵묵하고도 강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을 향한 단단한 믿음과 신념이었다. 굳이 글로 설명하자면 너무나 단순해서 김이 빠져버리는 것들에 가까웠다.
그들의 단순하기에 단단하고, 단단하기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신념을. 그 신념이 만들어내는 강인함을 나는 너무나도 닮고 싶었다. 나는 그들과 비교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감정적이며 연약한 인간이었으니. 복잡해지기보다는 단순해지려고 노력했다. 연약해지기보다는 강인해지려 노력했다. 감정에 휩싸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했다. 연습을 거듭해 나갈수록 그러한 것들은 터득되고 연마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들을 향한 애정을 마냥 버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천성적으로 그렇게 강인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밀려올 때가 있다. 삶이 무상해 보일 때.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초라해 보일 때.
세상에서 덩그러니 나 혼자만 놓인 것 같은 날들. 그런 날들 속에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삶을 향한 화풀이에 가까웠을까. 글은 원래부터 내 가장 친한 친구이니. 친구에게 털어놓는 넋두리일까. 가끔씩은 내 존재의 중심부로부터 감정들이 회오리치면서 나를 찢어놓을 때,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노트북을 켜고 타자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을 담아서 타자를 하나하나 눌러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를 훌쩍 넘긴 지금 이 나이에도 나에게는 아직 그런 시간이 필요하고는 했다, 잠시 나만의 조그마한 세계로 후퇴하는 시간. 연약하고도 헐거운 나의 세계로 도망가는 시간. 그럼에도 연약한 나를 닮아서 너무나도 반가운 글의 세계로 도망가고픈 시간. 못나고 못난 내가 나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지지하기 위해서 나의 언어로 하나하나 써 내려간 나의 글들. 무기력함에 깊게 잠겨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반복해 올 때. 그런 나를 위해서 남겨둔 애정 어린 나의 글들.
그리고 문득 힘든 나날들 속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나의 글들을 읽다 보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는 했다. 글들은 나에게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을 아무런 오해 없이 바라봐 준다. 내가 쓴 나의 글들은 내 속에서 해결되지 않고 영원히 폭풍우 칠 것만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지긋이 바라봐준다. 내 화풀이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려준다.
스스로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기에 글을 써둔다.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고, 나를 위로해 주며.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글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