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으면 삶이 무겁다
“하루 중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 언제입니까?”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요.”
“왜 그 시간에 가장 편안하시죠?”
“음…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 남은 인생을 가장 편안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네? 아, 하하하…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되겠네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기업체나 공공기관 의식교육 강의 중에 종종 하는 질문과 대답이다.
그런데 가끔씩은 이 대화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아니, 그러면 바보처럼 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바보같이 사는 건 아니죠. 바보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바보 같은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보스런 말과 행동만 하죠.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건 불필요한 생각 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 혹은 집착 없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게 되지요.”
유쾌하게 웃으면서 나누는 이야기지만, 실천하기가 쉬운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정말 문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시간을 확인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일어날까, 좀 더 누워있을까?’ 이른 시간이면 포근한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만, 늦잠을 잤다면 번개처럼 일어나 직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출근을 해서는 주어진 업무에 몰입해서 일하기도 하지만, 잡다한 생각에 마음을 뺏겨 시간만 보내기도 한다. 점심식사를 칼국수로 할지 생선구이로 할지, 고객에게 어떤 상품을 소개해야 할지, 수 억 원짜리 계약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의사결정까지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우리의 하루는 생각과 생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종종 ‘생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다. 이 학과를 지원할까, 저 학과를 지원할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면 불편하지만, 지원학과를 분명히 선택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바라던 대학, 학과에 합격하면 고민 자체가 사라진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성에 대해 마음이 불안정하고 들뜨기 쉽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안정된다. 끈덕지게 따라다니던 산만한 생각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편안한 상태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심사가 사라지면 또 다른 관심사가 수많은 생각들을 불러들인다. 대학에 합격하면 등록금이 문제고, 등록금을 해결하면 성적이 문제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이 문제고, 취업을 하고 나면 승진과 결혼이 문제다. 결혼을 하고 나면 배우자와 자녀가 문제고, 자녀가 장성하면 내 노후와 건강이 문제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다. 문제와 문제, 생각과 생각이 평생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 때 ‘죽고 싶다’고 한다. 자기(육체)가 죽으면 이 불편한 문제들에서 벗어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죽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몸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작용해서 몸이 움직이는 것인데, 몸이 죽는다고 생각이 끊어질 수 있겠는가? 사실 ‘죽고 싶다’는 말에 숨겨진 뜻은 ‘불편한 생각들을 사라지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한 마음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겉잡을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는 마음은 잠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면증을 겪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삶을 떠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소음이 시끄러운 사람에게는 사찰이나 수도원의 새소리도 시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끄럽다’는 생각이 사라진 사람이라야 언제 어디서라도 ‘고요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각을 당장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일단 생각을 단순하게 할 수는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싫다고 경적을 빵빵 누르는 운전자들, 시장통의 상인과 손님들, 길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모두 쫓아다니며 조용하게 할 수는 없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창문을 닫으면 된다. 그래도 시끄러우면 귀마개를 하면 된다. 여러 가지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들면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러나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처리하기로 결정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생각을 단순하게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부정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바람직한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끄럽다’를 ‘활기차다’로 생각을 바꾸어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고, ‘외부의 시끄러움’에서 ‘내면의 고요함’으로 관심의 대상을 돌려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도 있다. 아이가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을 때,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강도를 만난 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늘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겁게 놀고 있나 보구나.’라는 바람직한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과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모두 내려놓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 제한된 생각들에 가려져 있던 자기 본질로서의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삶의 모든 장면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죽음에 대한 연구에 바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삶의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삶을 최대한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책 『인생수업』에 등장하는 40대 여성의 이야기는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한 경험을 통해서 알려준다.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 외곽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라 고속도로가 붐볐지만, 어서 빨리 교외로 나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고속도로 중간쯤 갔을 때 앞서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나도 차를 정지한 뒤, 백미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뒤를 따라오던 차 한 대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그 차의 운전자가 한 순간 한눈을 팔았으며, 곧 내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차의 속도 그리고 내 차와 앞 차의 간격을 볼 때, 나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 보게 되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꽉 잡았던 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 쉬고는 양손을 옆으로 내려놓았습니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입니다. 삶에, 그리고 죽음에 순순히 나 자신을 맡겼습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는 눈을 떴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습니다. 내 앞에 있던 차는 박살이 났고, 뒤 차 역시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내 차는 그 중간에서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재가 몸의 긴장을 푼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근육이 긴장하면 심한 부상을 입을 확률이 훨씬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단지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를 지닌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꿀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것처럼 평화롭게 손을 편 채로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집착을 버려야 한다.” 혹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종종 만나는 지인들에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일할 때 오히려 바라던 결과가 나오더군요.”라고 말하면 “정말 그렇지!”라고 공감해 주는 분들도 있지만, “알면서도, 그게 참 어려워.”라고 하는 분들이 더 많다. ‘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집착하는 마음 없이 일하는 편안함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정말 경험했다면, 앞으로도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즐거움을 계속 누리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성자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했다. 진리와 마음의 법칙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활용하여 점점 더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고, 영적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점점 더 빈곤하고 메마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빈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 풍요와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적 원리는 현실의 삶에도 충분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제한된 생각들을 다 버리면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성취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물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자기가 사라지면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
오래 전 나의 스승이신 신병천 마스터께서 강의 중에 하신 말씀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러면 나의 개성도, ‘나’라는 의식도 다 사라지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인식해 온 ‘나’라는 생각과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에고(ego, 개체적인 자아의식)’였다. ‘나’라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파생된 무수한 생각들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이 다 사라진다는 게 몹시 두려웠다.
그러나 ‘참 나’(진정한 자아)의 본질이 영원한 생명이며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서 에고의 허상을 통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저 물거품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라지면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이 사라지면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바른 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편안하게 두 손을 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행복한 명상에 잠긴다. 에고는 없다. 온 세상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하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된 것이 정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