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난 항상 외로웠다.
어릴 적 약해 빠진 날,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할 부모님은
언제나 날 향해 엄청난 원망만 했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은 원치 않는 결혼을 했고
그래서 당연히 불행했다는 것.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나.
나만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정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래서 난 항상 죄인이었다.
당연히 내 말은 부모님에게 의미가 전혀 없고
언제나 묵살되고 무시되었다.
나란 존재...
그랬다. 난 그런 존재였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불필요함의 대명사.
당연히 그런 이유로 난 철이 빨리 들었다.
사춘기라고 할 것도 없이
내 존재에 대해 따져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때의 내가 하기에는
너무 벅찬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당연히 공부는 집중할 수 없었다.
남들은 모두 부러워하는 8 학군에서 공부했지만.
내겐 공부에 대해 그 어떤 지원도 없었다.
사실 엄마는 내가 학교를 다니는 것도 불만인 거 같았다.
그냥 자퇴를 하거나 검정고시를 봐서
대충 인생을 살길 바라는 것 같은 말만 반복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보단 확실히 똑똑해 보이는 아버지는 그래도 공부는
학교에 다니면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엄마는 내 교육에 철저하게 무관심했고
돈을 벌어야 했던 아버지는 날 챙길 여력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첫 중간고사를 보고 난 뒤.
그 성적표를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난
내 형편없는 성적이 적힌 종이를 넘겨드렸다.
당연히 그 문제로 엄청난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또 문제가 되었다.
난 이제 인이 박혀
그런 부부 싸움에 대해 별로 문제를 삼지도 않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날 밖으로 불러냈다.
어울리지도 않게 학교 앞 분식집에 데려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는 순대와 떡볶이를 사주면서
과외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따뜻한 권유가 아니라 그냥 강요였다.
뭐 나야 할 일도 없고 성적 때문에 부부싸움으로 파생될 문제를 너무 잘 아니까.
그냥 아버지 말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이 아버지의 연인.
그리고 나에겐 작은 엄마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차로 날 데려간 곳은 생뚱맞게 치과였다.
난 사실 충치 치료를 하면서 치과가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아버지가 더 무서웠기에
어쩔 수 없이 치과에 함께 들어갔다.
치과 의사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반가워했다.
아직 어렸던 내가 보기에도 너무 심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아주 살갑게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눈 뒤.
그때서야 날 보며 마지못해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전 성근이라고 합니다. 최성근이요."
"그래 반갑다. 성근아."
작고 하얀 손을 내게 내밀어 악수를 했는데.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보는 아버지는 항상 무뚝뚝하고 엄마에게 싸우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날 향해선 항상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기만 헀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아주 살갑게 대하는 모습은 그때 처음 보았기에 너무 의아했다.
"내가 보기까 이놈 기초가 영 엉망이야. 내가 시간만 있으면 옆에서 붙잡고 가르치면 될 거 같은데..."
"오빠 닮아서 똘똘해 보이는데."
"아니야. 지 엄마를 닮은 것도 있어서 성격도 더럽고 고집만 세고... 거기다 머리도 나쁜 거 같기도 하고."
"에이. 언니도 나름 공부 잘했어... 많이 놀아서 그러지."
치과 의사인 작은 엄마는 내 엄마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맡아서 이놈 기초 좀 잡아줘라."
"큭큭. 그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응. 아직 정리를 하긴..."
아버지는 '정리'라는 말을 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땐 그 '정리'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그 정리란 것이 엄마와의 별거를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말한 '정리'가 이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하여튼 난 그렇게 아버지의 새 부인? 첩? 정부?
세상이 작은 엄마를 뭐라고 부르던
나에겐 과외 선생님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며 작은 엄마에게 배운 덕분에 성적이 쑥쑥 올랐고.
아버지는 무척 만족했다.
그렇게 내가 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하게 되고.
그걸 기념한다고 아버지가 내게 먹고 싶은 걸 물었을 때.
난 피자를 먹고 싶다고 했었다.
아버지는 제일 큰 피자 2개를 주문해 1판은 온전히 나 혼자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참 좋았다.
엄마도 내 성적이 오른 것에 기뻐했지만...
나의 과외 선생이 누군지 알고는... 피자 타임은 헬 타임으로 바뀌고 말았다.
"민정이지?"
갑자기 엄마는 처음 듣는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엄청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가?"
"너 민정이 한테 과외 부탁한 거잖아."
민정?
엄마는 놀랍게도 그때까지 나도 모르던 작은 엄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긴 작은 엄마도 엄마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해서 서로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서로를 아는 게 확실했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잘 안다는 건데...
도대체 아버지는...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그 독특한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래. 네가 성근이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민정이에게 부탁했다. 왜?"
"너 이젠... 성근이 핑계로 아예 민정이하고 살림을 차리려는 거야?"
"그러는 넌... 나 몰래 다른 사람 만나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버지는 말을 하려다 날 바라보았다.
난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엄마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키라는...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부부싸움 중에 나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한 건.
"야, 애도 못 낳는 민정이가 그렇게 좋냐? 이민정. 그 년이 그렇게 좋냐고? 난 그래도 최소한 너 아들은 낳았잖아!!!"
"너.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계속해서 내게 눈치를 주었다.
난 탁자 위에 놓인 피자를 들고 내 방으로 가져가려 했다.
"이 미친 새끼가... 어딜 도망가려고!!!"
턱...
내가 들고 있던 피자를... 그것도 하나도 먹지 않았던 새 피자를 엄마가 쳤고.
그대로 공중에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퍽...
불행하게도 내 몫의 피자는 바닥에 엎어져서 떨어졌다.
난 바닥에 떨어진 피자를 보며 뱃속 가장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낀 살기였다.
"민정이. 그 년한테 성근이 데려가서... 새엄마라고 소개라도 한 거야?!!"
"야, 말 조심해. 성근이가 있는데..."
"이런 새끼가 옆에 있는 게 뭐가 문제인데!!!"
엄마는 폭주했고 탁자 위에 있던 다른 피자를 발로 차서 바닥에 밀어 버렸다.
단 한조각도 먹지 못한 피자 2판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퍽... 퍽... 퍽...
엄마는 화를 주체 못 해 바닥에 떨어진 피자를 발로 마구 짓밟고 또 짓밟았다.
그걸 보고 있는 내 마음도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엄마에 대한 엄청난 반감.
그전까지는 그냥 엄마라는 존재가 무섭기만 했는데.
이제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년한테 성근이 새엄마라고 소개해 준거지. 그러니까. 민정이 그 여우 같은 년이... 꼬리를 친 거네. 두 남자 새끼 전부에게 꼬리를 친 거야. 으아아악!!!"
"야, 너 너무 심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성근이가 처음 반에서 1등 한 건데."
아버지는 바닥에 떨어진 피자를 보며 난감해했다.
"뭐 어때? 이걸 목구멍으로 넘기려고 한 거야. 그 민정이 미친년이 연관된..."
"아이 앞에서 너무 심한 거 아냐?"
"뭐가 심해? 그래도 난 너랑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넌 성근이 이용해서 아주 그 년 하고 살림을 차린 거잖아. 안 그래 이 미친 새끼야!!!"
엄마가 아버지에게 욕을 시작하면 이미 이건 되돌리긴 늦은 거였다.
다만 지금의 부부싸움에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는데.
그건 아버지가 내 눈치를 심하게 본다는 거였다.
"나만 그랬냐? 너도 그놈하고.. 만나서..."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자꾸 내 눈치를 봤다.
뭔가 엄마에 관련된 말을 하려다가도 자꾸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비나 아들 새끼나 똑같아."
갑자기 엄마는 내 양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너도 크면 너 아빠처럼 부인이 있는데도 딴 여자에게 눈길이나 주고 그러겠지. 그 씨알머리가... 그 피가 어디 가겠냐고?!!"
"..."
"너도 남자니까. 니 아비처럼 그럴 거야. 저주받은 더러운 피를 물려받고 태어난 놈. 그냥 뒈져버려. 뒈져 버리라고. 어서 뒈져버려!!!"
엄마는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난 엄마에게 양팔이 잡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엄마가 제발 이 자리에서 죽기를...
"넌 왜 태어난 거야? 너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지도 않았을 텐데. 넌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날 힘들게 하냐고? 왜? 왜? 왜?"
엄마는 피자로 뒤범벅된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꺼욱... 꺼으으윽...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미친년이야. 흑흑흑..."
난 처음으로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전까지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무지막지한 용사 같은 모습이었는데.
엄마도 사실 여자였다.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니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냥 여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엄마를 잠시 바라보다가 내게 다가와 10만 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방으로 가 있어라."
"예..."
난 손에 쥔 10만 원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내 방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엄마를 일으켜 소파에 앉히고는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다.
언제나 끝장을 볼 거 같이 싸우던 두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뭔가 이상했다.
아버지 품에 안겨 한없이 울기만 하던 엄마...
난 솔직히 두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서로를 죽도록 증오하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작은 엄마가 운영하는 치과 건물에 도착했다.
[이민정 치과]
작은 엄마의 이름이 적힌 커다란 간판에는 서울대 마크가 크게 찍혀 있었다.
난 차를 주차하고 난 뒤.
작은 엄마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와 치과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줄 음료수를 샀다.
"어떻게 오셨..."
직원은 날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아직 마무리 안 했나요?"
"오늘은 일요일이라 원래 진료가 없는 날인데..."
직원은 약간 투덜거렸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먹을 걸 좀 사 왔지요. 우리 엄마를 도와 너무 수고를 하시니까요."
"안 사 와도 되는데..."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들은 내가 사 온 음식을 들고 대기실 한쪽으로 몰려 갔다.
"성근이 왔구나."
"예. 엄마."
참 반가운 얼굴이다.
언제나 날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
그래서 난 작은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
2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