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내기
온몸에서 진이 빠져나가고 있다. 몸이 뜨끈뜨끈하고 땀이 나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다리도 팔도 뻐근, 허리도 뻐근, 손도 뻐근하다. 손은 쥐었다 폈다 하기가 불편할 정도로 부었다. 전부 오늘 9시부터 14시까지 다섯 시간 동안 건축목공기능사 시험을 본 여파이다.
아무래도 긴장이 됐었는지 오늘 아침에는 평소보다 일찍 깼다. 이부자리에서 허리 스트레칭을 조금 하고 일어나서 다이어리에 아침 기록을 했다. 감사한 일 세 가지와 '오늘 할 일-건목기능사 시험 보기.'
자전거를 타고 가면 대중교통보다 20분 가까이 도착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만 어제 아름다운 첫눈이 내린 관계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험장에 여유 있게 도착하기 위해 샤워와 머리 감기는 생략하고 세수만 했다. 밤에 전부 하기도 했고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뻗치지 않도록 잘 말린 후에 베개에 뒷머리를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기까지 했으니 문제없다.
그저께 뭘 잘못 먹었는지 그 후로 이틀 동안 계속 배가 아프고 속이 불편했기 때문에 어제저녁은 굶고 오늘 아침엔 끓인 오트밀을 천천히 먹음으로써 시험 전 컨디션 관리에 나름 만전을 기했다. 아주 좋은 판단이었다. 덕분에 시험 시간 동안을 탈없이 지나갔다.
세 달 동안 월요일, 화요일에 건축목공 수업을 들었다. 처음엔 설명도 그림도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아서 힘들었다. 톱질도 기본 톱질 연습부터 하고 그랬다. 그리고 지난주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체 과정을 한 번에 연습해 보는 모의시험을 쳐봤을 때 큰 실수를 했었다. 심지어 시험 직전 마지막 수업인 이번 주 월요일, 화요일까지만 해도 잘 모르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시험을 칠 때는 모르는 부분이 없었다. 톱질도 깔끔하게 했다. 실수도 하지 않았다. 모두 실수를 미리 해둔 덕이었다. 결과는 19일에 나오지만 불합격 조짐도 없었고 결과물 퀄리티도 역대급이었으니 합격은 할 것 같다.
시험에서는 연습 상황과 다른 변수가 이것저것 생기는 바람에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했다. 총 다섯 시간 중에 10분 남기고 완성했다. 일찍 끝낸다고 가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니 최대한 신중하게, 침착하고 여유 있게 시험을 치르려고 의도를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지나치게 느긋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저께 시험을 보셨던 같은 야간반 동기 분 중에 빨리 끝내고 제출했다가 실격된 분이 천천히 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을 듣길 잘했다 싶다.
학기 중에 배우는 과정에서 어렵다고 포기하고 그만두신 분도 있었고, 등록 다 해놓고 오늘 결시한 분도 있었다. 시험을 치다가 안 되겠는지 스스로 포기한 사람도 두 명 정도 있었던 것 같고 실격급 실수를 하고 중도 퇴장 당한 분, 다 만들고 실격된 분도 있었다. 그분들이 속상해하는 걸 보고 있으니 나도 조금은 속상,하진 않았고 시험을 잘 봐서 너무 기뻤다.
결시를 하신 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만이 있다. 쓰다 보니 '약간'이 아닌 것을 알게 돼서 앞으로 돌아와 수정한다. 화가 좀 난 것 같다. 그분은 요 며칠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실격하면 망신이잖아요" 하는 말씀을 종종 하시더니 오늘 결시를 하셨다. 그분의 이번 시험 응시를 위해 그동안 많은 분들이 자기 연습하는 시간을 나눠서 그분이 모르는 부분을 알려 주고, 청소도 대신해주고 큐넷에 시험 신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험 전 날 공구 세팅까지 대신해줬는데 결시라니. 서울에 시험장이 많지 않아서 응시 경쟁도 치열한데 한 자리가 허무하게 낭비된 것도 싫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싫다.
시간 내에 완작을 못 하는 건 망신이 아니다. 시험 중에 오작을 해서 실격을 해도 망신이 아니다. 빠른 사람에 비해 느릴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실수, 평소엔 하지 않던 실수도 시험 당일 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들은 할 수 있는 걸 한 것이다. 진짜 망신은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모습이 아닐까.
시험이 끝나고 자리 청소를 할 때도 답답함을 느꼈다. 3개월을 다녔는데도 아직 자기 자리 청소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몇 명의 동기들을 보고 있으니까 그랬다. 교육원 강사진 분들의 인간 불신과 그로 인한 방어적인 태도가 이해가 된다. 지독히도 뻔뻔하고 이기적인 몇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세상 모든 상황에 염증을 느꼈다.
이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품은 채로 시험장을 떠나기 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 했다. 속상하고 힘 빠지지만 그래도 돕고 돕는 선순환도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합격의 기쁨이 커서 부정적인 에너지를 압도한 것 같다. 오늘 야간 수업을 응시생 특혜로 빠지기로 결정한 덕도 있었다. 따뜻한 공간을 방문해 빈백에 누워 안대를 쓰고 기립근의 연축을 느끼면서도 푹 쉬었더니 지금은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다행이다.
'해내기'라는 부제를 지을 때만 해도 시험 해낸 것, 학자금 대출 완제한 것을 짤막하게 쓸 생각이었는데 성토대회가 돼버릴 줄이야.
며칠 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출 잔액 100만 원을 상환하고 모든 학자금 대출을 완제했다. 졸업 전까지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장학금을 몇 번 받다 보니 조금 일찍 다 갚게 됐다. 재입학하고 수입을 만들면서 과소비지수를 가지고 계산해서 매달 얼마 정도까지는 쓰고 얼마까지는 갚으면 되겠다 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다 싶다.
그리고 완제 기념 선물로 나에게 선물한 권리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 가족들이 그동안 학생이라고 나한테 밥값 계산도 안 받고 그랬는데 그 한도 좀 풀고 싶고 책을 사서 6남매와 부모님께 한 권씩 돌리려고 한다. 행복한 연말이 될 것 같아서 흐뭇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나를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