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처럼 도약하다
1940년대 미국의 과학 행정가이자 공학자였던 부시(Vannevar Bush)는 “과학, 그 끝없는 경계(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보고서에는 혁신을 통해 사회와 경제에 기여하기 위해서 기초 과학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며 연구 기반의 기술 개발을 통해 혁신을 달성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서는 당시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바로 이것이 ‘과학 연구, 기술 개발, 혁신’이 순차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른바 “혁신의 선형 이론”의 시초이다. 혁신의 선형 이론은 20세기 미국의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투자 확대, 전문 인재 육성, 그리고 정부 주도 R&D 전략 수립 등, 1세대 혁신 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최근 이 혁신의 선형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독특한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바로 “립프로깅(Leapfrogging)”이다. ‘개구리의 도약’을 연상시키는 단어인 립프로깅은 기술의 진보와 수용, 확산에 있어서 기초 단계부터 꾸준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의 여러 계층을 건너뛰고 곧바로 고도화 국면에 진입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통신 네트워크가 취약한 아프리카에서 무선 전화 보급률이 유선 전화의 보급률을 역전한 현상, 신용카드 결제 기반이 약하고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중국이 일반적인 지급결제 기술과 인프라의 발전 단계를 건너 뛰고 세계 최대 간편결제 시장으로 급부상한 현상 등이 대표적인 립프로깅의 예이다. 꾸준한 연구를 통해 기술이 진보해야만 비로소 혁신이 가능하다고 주창한 부시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립프로깅 현상들을 목도했다면 아마도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립프로깅은 분명 기존의 선형적 사고의 틀로 설명이 쉽지 않은 현상이며 인과 관계에 기반한 추론과 전통적인 예측 방법론으로는 과연 누가 립프로깅을 할지, 앞으로 어떠한 립프로깅이 발생 가능할지 예측하는데 한계가 있다. 또 학문적으로도 아직 정립된 개념이 아니고 축적된 사례가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이 현상을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립프로깅이 주로 개발 도상국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고, 이들이 각 분야에서의 립프로깅을 발판으로 선진국의 문턱 앞에 있는 한국을 추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분명 우리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 할 현상임에 틀림 없다.
흥미로운 것은 립프로깅과 유사한 현상이 국가와 산업 차원 뿐 아니라 개인 소비자 차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한번도 이용해 본적 없는 어린이가 태블릿 PC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인터넷 포탈이나 이메일의 이용 경험 없이 모바일 메신저를 즐겨 쓰는 노년층이 증가하는 현상 등이 그렇다. 즉 기존에 익숙한 사람 만이 발전된 테크놀로지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화된 디지털 기술과 IT 서비스를 누구라도 쉽게 경험하고 곧바로 생활에 이용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혁신의 확산 모형”에 따르면 혁신가는 약 2.5%에 불과하며 혁신을 가장 초기에 수용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s)는 전체 소비자의 13.5%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립프로깅이 일반화된다면 혁신의 확산 모형 같은 결정론적 이론 체계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영원한 얼리 어답터는 존재 할 수 없으며 동시에 누구나 얼리 어답터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어떤 기술이 어떠한 사용자 그룹에 의해 시장 내 지배적 모델로 채택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시장에서 경쟁자가 먼저 립프로깅을 하면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립프로깅 현상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와 더불어 우리 기업도 립프로깅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소비 트랜드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른 산업일수록 립프로깅에 대한 준비가 중요하다. 또한 R&D 비중이 높은 기업과 연구 기관의 경우 고객과 시장 분석, 미래 패턴의 예측에 있어서 극단적 이상치(outlier)가 발견되면 과거와 같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며 새로운 현상의 조짐을 보여주는 단초는 아닌지 추가적인 관찰과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작고 다양한 니즈(needs)를 탐색하고 새로운 기술 트랜드를 포착하는 모니터링을 강화하면서, 어떤 분야에서건 현재의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에 꾸준히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각도의 분석과 실험을 시도하는 체제를 정착시킨다면 우리 기업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파급력 있는 립프로깅을 실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