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친구
친구 만들기에는 여러 요소가 필요하겠지만 사는 곳의 위치도 한몫하는 것 같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은 반 친구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정훈이와 성수라는 친구인데,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하교길에 자주 마주치다 보니, 나중에는 셋이 함께 하교하게 되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서로를 알게 되고 친밀해졌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절친이 되었다. 우리 세명은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공부를 같이하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오락실도 같이 다녔다. 정훈이는 집에 부모님이 없다며 성수와 나를 불러, 은밀하게 빨간 비디오도 몇 번 봤다.
친해질수록 서로 존중해 줘야 되는 것인데, 어릴 적에는 그러지 못했다. 어느 순간 장난의 강도가 세지고 막말도 하게 되었다. 어릴 적 일이라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장난으로 성수는 우리와 절교를 선언했다.
우리 세명은 절친이었는데, 그 관계가 깨지니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싶었다. 하교실에 정문에서 성수를 기다렸다. 성수는 벌써 친구를 사귀었는지, 처음 보는 친구와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성수를 불러 세웠다.
-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 너랑 할 이야기 없다.
- 저번에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우리 다시 친하게 지내자.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성수에게 나는 다시 다급하게 사과를 했다.
- 꺼져. 새끼야.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성수는 ‘고소하다’는 듯 비웃으며 나를 지나쳤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나의 잘못이 큰 것은 아니 듯싶다. 어찌 되었든 창피함에, 애걸복걸하며 사과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성수는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을 정훈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정훈이가 다소 불쾌해했다.
- 친구끼리 장난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리고 사과하고 앞으로 서로 조심하면 되잖아. 친구끼리 그 정도로 삐지고 그러냐.
나는 성수의 민감한 행동보다 그 짧은 기간에 새 친구를 만든 것에 더 실망했다. 우리의 즐거웠던 추억이 많은데, 성수는 그 추억들은 휴지통에 버린 것 같다. 그동안 정성과 시간을 들여 맺어진 친분을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고 다시 새로운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 그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성수가 얄미웠다.
우울해하는 나를 보며 정훈이는 “괜찮다”라고 했다.
- 우리도 그놈처럼 새 친구를 영입하자. 생각해 둔 친구가 있어. 다른 반 친구야. 학원 다니면서 알게 되었어. 공부 잘하는 친구야. 우리가 배울 게 많을 거야.
“병호”라는 친구였다. 병호는 관상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병호의 얼굴을 보면 ‘공부 잘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범생같이 생겼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는 짧았다. 옷은 항상 단정했다. 정훈이의 말로, 병호는 모든 것이 다 완벽한데, 학구열이 너무 높은 것이 흠이라고 했다. 며칠 전 학원에서 수학수업을 같이 듣는데, 학원선생님이 수업준비를 제대로 못한 듯하다. 문제 하나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었다.
- 이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알아내서 여러분께 알려드릴게요.
수학선생님은 자신이 수학문제 하나를 못 푼 것에 미안해하며 다음에 알아오겠다고 했다. 그때 병호가 여러 명이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을 나무랐다.
- 선생님이 그걸 모르면 어떡해요?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학원 다니는 겁니다. 우리가 돈 내고 학원 다니면 선생님은 그 돈으로 월급 받잖아요. 그럼 선생님역할 똑바로 해야죠.
나는 정훈이의 이야기를 듣고 놀랬다.
- 이야. 용기가 대단하다. 선생님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다니. 학교랑 학원선생님은 좀 다른가?
- 학원은 안 때리잖아.
- 그 학원선생님은 창피했겠다.
- 맞아. 그 수학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병호 보고 남으라고 했어. 그리고 뭐라고 했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데, 여러 학생이 있는 곳에서 창피를 주면 어떡하냐고. 병호도 지지 않고 계속 따졌어. 그 후 수학선생님은 병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
병호가 우리의 울타리로 넘어와 친구가 되었고 성수의 빈자리를 채웠다. 정훈이는 되게 좋아했다.
- 병호는 반에서 항상 5등 안에 들어. 공부 잘하는 친구야. 우리도 병호 영향 받아서 공부 열심히 하자.
정훈이의 성적이 조금 올랐다. 공부와 친구는 서로 접점이 없는 것 같은데, 정훈이는 친구 덕분에 성적이 오른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병호는 교과서 펼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고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또 본인의 친척 중에는 변호사나 의사가 많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병호의 영향으로 우리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개인이 운영하는 도서관인데, 집과 가까웠다. 병호가 공부하는 방식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해 주었지만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았다.
- 미안, 나 지금 공부해야 돼.
물어본 내가 살짝 뻘쭘해졌다. 내가 병호의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병호의 단호함에 서운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세명의 친구 중에 정훈이가 중심에 있었다. 정훈이가 보통 몇 시간 공부하고 언제 놀러 갈 것인가를 계획하고 제안했다. 그럼 병호와 나는 별말하지 않고 정훈이의 말을 따랐다. 정훈이가 이번주 주말에 오락실에서 1시간만 게임하다가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의례 그래왔던 것처럼 수긍했다.
병호가 나에게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모범적인 친구라 마음에 들었다.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 주눅이 들었지만, 절친이 된다면 나의 삶과 인생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 믿었다. 정훈이도 성격이 활달하고 긍정적이기에 인생친구로 딱인 듯싶었다.
주말에 공원에서 만나, 다 같이 오락실로 향했다. ‘오락게임 몇 판으로 기분전환하고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자’며 결의를 다졌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며 오락실로 들어갔다.
주말 점심시간인데 사람이 몇 명밖에 없었다. 정훈이는 역시나 격투게임을 했다. 두 사람이 나와서 격투를 하는데, 상단에 에너지바가 보였다. 때려서 그 바 색깔이 깎이게 만들어 없애면 이기는 것이다. 정훈이와는 달리, 나는 격투게임을 하지 않았다. 격투게임은 동전이 많이 소모되는 게임이다. 잘해서 계속 이기면 지속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지만 내 실력은 형편없었다. 잘하는 고수가 동전을 넣고 대전하면 게임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2D형식의 아케이드 게임을 주로 했다. 총이나 미사일을 쏘거나 검으로 상대방을 없애고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이다. 병호는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다가 지루했는지 동전을 넣고 나와 같이 팀플레이를 했다.
게임 잘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쿵, 퍽”하는 파열음과 함께 정훈이가 넘어져 얻어맞는 것이 보였다. 마음은 도와주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훈이를 때리던 녀석은 덩치가 큰 것이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도왔다가는 나도 얻어맞고 낭패를 당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기를 바랐다. 불량고등학생이 정훈이의 머리를 때리고 발로 어깨를 밝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 에이. 재수 없어.
불량고등학생은 쌍욕을 하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고등학생이 보이지 않자, 몸이 움직였다.
-정훈아, 괜찮아?
나는 정훈이를 부축하여 게임기 앞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왜 맞았는지 물었다.
상황은 이랬다. 정훈이가 격투게임을 하는데, 덩치 큰 고등학생이 동전을 넣고 같이 대전을 했다. 게임은 정훈이의 승리로 끝났다. 그동안 갈고 닦은 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근데 느닷없이 그 고등학생이 말을 걸었다.
- 야! 너 동전 좀 있어? 있으면 좀 줘.
- 없는데요.
- 있으면 죽는다.
고등학생은 정훈이의 동의도 없이 정훈이의 바지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백 원이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다.
- 이 개새끼가. 거짓말을 해?
그때부터 고등학생의 일방적인 폭행이 시작되었다. 주먹으로 정훈이의 얼굴을 때렸고 폭행은 몇 분 간 지속된 것이다.
우리는 하던 게임을 그만하고 다 같이 오락실을 나왔다. 정훈이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폭행으로 눈 주위가 부어올랐고 코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발로 밟혀서인지 옷도 지저분해 보였다.
정훈이의 상처를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미안하고 비참하다. 싸움을 말리지 못해서 미안했다. 말리다 나도 맞을 것이 두려워, 방관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 창피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서관 가지 말고 그냥 집으로 가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근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병호가 느닷없이 웃으며 말했다.
- 우리 좀 있으면 시험이잖아. 난 특히 이번 시험에 더 좋은 성적을 받을 거야. 엄마가 저번보다 성적이 더 오르면 나하고 싶은 거 해주기로 했거든. 성적이 오르면 엄마한테 무엇을 사달라고 할까? 기분 좋은 고민이야. 기분 좋은 고민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열공해야 되겠지? 우리 오늘 도서관 가서 저녁까지 먹고 8시까지 공부하자.
입에서 욕이 나올 뻔했다. 제정신이냐고? 정훈이가 폭행당할 때 보고만 있었으면서 미안하지도 않냐고.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고 욕과 함께 물어보고 싶었다. 속으로 병호에게 욕을 했지만 실제로 별말하지 않았다. 병호를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우등생이라는 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망감은 컸다.
병호는 여전히 정훈이의 상황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지껄여댔다. 중학교 시절에는 소시오패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병호는 소시오패스가 틀림없다. TV에서 소시오패스는 본인만 생각하고 주변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훈이와 병호, 나. 이렇게 세 명이 인생친구, 절친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안될 것 같다.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대로 시험이 끝나고 우리의 관계는 데면데면해지고 소홀해졌다.
우리 세명은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병호는 공부를 잘해서 우리 시에서 서울대합격자가 가장 많이 배출되는 명문고등학교로 진출했다. 그 후로 다시는 병호를 보지 못했다. 정훈이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는 했지만 계속 연락해서 만나거나 놀지는 않았다.
“입시”라는 경쟁 속에 끈끈한 신뢰로 이어진 절친, 인생친구는 희석되어 갔다. 그리해도 어릴 적부터 심어진 “인생친구, 절친 만들기”라는 목표가 여전히 꿈틀거리며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