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친구와 재미있는 친구
고 1 때 마음에 와닿는 친구가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 없이 외톨이로 지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 이사를 갔는데,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환석이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같은 반이며 하교길이 같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환석이는 모범생이며 집은 교육가 집안이다. 부모님 두 분 다 대학교수라고 했다. DNA가 우수해서인지, 환석이는 공부를 잘했다. 영어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읽어보라고 시켰는데, 항상 환석이를 지목했다. 원래 영어 읽기나 수학문제 풀기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몫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 나와서 영어를 제대로 못 읽거나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면 시간낭비라는 것을, 선생님들도 일찍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고1 영어선생님은 환석이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었다. 환석이의 부모님이 교수인 것도 영어수업 시간에 듣게 된 것이다.
병호처럼 본인만 아는 녀석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다행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짜증 내지 않고 가르쳐주었고 다른 것들도 많이 배려해 주었다. 인성은 괜찮았다. 근데 단점이라면 재미가 없다. 환석이가 평일에 움직이는 동선은 단조로웠다. 집, 학교, 학원, 도서관이다. 내가 환석이를 오락실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오락에 흥미가 없었다. 게임이나 운동 등 뭔가를 같이 하는 공통관심사가 있어야 대화가 즐겁고 재미있을 텐데, 환석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공통관심사를 찾기 어려웠다. 하교길에 대화를 나누다, 대화가 잠시 끊긴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럴 때면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할 말을 만들어내느라 진땀을 흘리곤 했다. 어떨 때는 앞에 했던 말을 다시 하곤 했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지만 책은 남들만큼 읽은 것 같다. 그래서 환석이에게 책이야기를 꺼냈다. 한국단편문학이나 미국고전소설, 산업화시기의 영국문학 등에 이야기했다. 환석이는 눈만 깜박거린 채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기에 여러 분야의 책도 많이 읽은줄 알았다. 환석이는 “못 읽어봤다.”라고 했다.
책 제목은 들어본 것 같아. 근데 책을 읽지는 않았어. 난 국어시험에 나올뻔한 것만 읽었고 교과서나 참고서만 봐.
나는 재미로 판타지 스릴러 소설 등을 읽었는데, 환석이는 오직 국어 문제에 나올만한 책만 읽는다고 했다. 공부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 보니 나와 공통관심사가 달랐고 대화가 길게 이어지질 않았다.
환석이 주위에 친구가 많지는 않았다. 나처럼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처럼 진짜친구, 인생친구 만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환석이가 내 인생친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선 재미가 없고 너무 모범생이며 엘리트였다. 머리가 크니깐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계산되었다. 환석이가 커서 사회로 진출한다면 부모님처럼 교수나 선생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공부를 잘하지 못함으로 중소기업 등의 공장에 취직해 현장에서 기술직으로 일할 것이다. 그러니 직업적인 신분 차이가 날 것이고, 그 신분이 보이지 않는 벽이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게다가 난 재미난 친구가 좋았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주말에 만나서 놀고 싶은 친구. 그런 친구가 내 인생친구, 절친이 되었으면 좋겠다. 근데 환석이는 아닌 것 같다. 같이 있으면 좋은데 크게 즐겁지가 않다.
환석이가 커서 교수나 선생님 등의 지식인이 된 상태로 친구관계가 유지된다면 배울 점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시절, 혈기왕성한 시기의 난 재미있고 든든한 ‘인생친구’를 원했다. 환석이는 나와 더 친해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난 “그닥”이었다.
고 2 때가 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라 그런지 문과와 이과로 나눠졌다. 나에게 수학이 참 버거웠다. 공통수학도 잘 모르겠는데, 그다음단계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깜깜했다. 특히 이과는 고난도의 수학을 공부한다고 했다. 수학이 싫어서 문과로 빠졌다. 문과보다 이과를 지원한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난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 점심시간, 밥을 먹고 소화시킬 겸 학교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학교 뒤쪽으로 조경이 잘되어있다. 학생이 다니는 도보는 자갈돌이 깔여 있고, 양 옆으로 성인 키 높이의 소나무와 이름 모를 식물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난 그곳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니, 나와 같은 학년의 학생들이 재미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축구 골대 절반크기의 간격으로 두 소나무 사이에 한 친구가 우유팩을 들고 서있다. 우유팩은 종이로 만든 팩으로, 마시는 부위를 안으로 접어 만든 정사각형모양의 공이다. 그 공을 앞으로 3걸음쯤 되어 보이는 거리에 위치한 친구의 가슴팍에 던져주었다. 그럼 그 친구는 가슴트래핑(축구기술)을 한 후 상체에서 내려오는 우유팩을 무릎이나 발을 이용, 두 소나무 사이에 집어넣는 게임이었다. 공을 가슴으로 받아 차 넣는 친구가 공격이고, 공을 던져준 친구는 수비이며 골키퍼 역할도 했다.
그 놀이를 하는 애들이 너무 재미나게 놀아서, 넋을 놓고 구경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성규”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성규는 운동신경이 좋았다. 공을 가슴으로 받는데, 이상하게 던져주는 공은 받지 않았다. 그럼 던지는 수비자는 다시 공을 던져야 했다. 성규는 좋은 궤도로 오는 공을 그대로 가슴으로 받아 발로 쉽게 차 넣어버렸다.
- 골.
성규는 큰 소리를 외치며 축구국가대표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따라 했다. 그럼 나머지 친구들도 성규를 따라 했다. 과장된 몸짓과 성대모사를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는데, 성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야! 너도 와서 같이 하자.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지만 학교 내 오다가다 만났기에 같은 학년인 것은 알고 있었다.
- 그래? 해도 돼?
- 그럼. 우린 점심시간마다 이렇게 놀고 있어. 하고 싶으면 점심시간마다 와서 같이 놀자.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성규는 이과반이다. 점심시간마다 놀러 가게 되었고 성규 덕분에 이과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싶은데, 공 차는 학생들이 너무 많고 다칠 위험이 켰다. 게다가 운동장이 흙바닥이라 점심시간 멀리서 보면 흙먼지가 자욱했다. 깨끗하고 다칠 위험 없이 공을 차고 싶은 친구들이 이 놀이를 했다. 이 놀이의 정확한 명칭은 없었다. 다들 그냥 “가슴 트래핑 놀이”라고 했다. 편을 나누어서 공격, 수비를 번갈아가며 하기고 했고 1대 1 서바이벌 게임을 하기도 했다.
가슴 트래핑 놀이를 할 때 성규를 보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다. 공격으로 골을 넣으면 유명 축구선수의 골세리머니를 과장되게 따라 했고 상대방이 공격에 실패하면 재미난 비유로 놀렸다. 또한 상대방이 가슴 트래핑을 하려고 하면 뒷발치에서 개그맨 흉내를 내며 말로써 방해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재미난 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