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영화 “친구”가 한창 유행이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같이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라는 문구와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앞을 노려보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저런 친구 있으면 정말 든든하겠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주말에 또다시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성규와 만홍이가 영화 “친구”를 보고 온 모양이다. 술자리에 계속 영화 “친구”이야기뿐이다. 역시나 성규는 친구 이야기를 되새기며 콩트를 하기 여념이 없다.
- 만홍! 니가 가라. 하와이. 당장
- 내는 아직 여권도 없다. 그래서 가고 싶어도 못 간다.
- 개새끼야. 그럼 부곡하와이라도 가라. 칼 처맞기 전에.
난 그때 영화를 보지 못해 내용은 잘 몰랐지만 성규의 진지한 대사처리와 쌍욕만으로도 그 상황이 짐작되어 웃겼다. 만홍이가 지겨운지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 허~. 이 새끼. 우리 우정이 이것밖에 안되나?
성규는 오히려 성화를 내며 만홍이와의 첫 만남을 또 이야기해 주었다.
- 그만해라.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친구들의 제지에도 성규는 아랑곳하지 않다.
- 내 초등학교 6학년 때 오락실을 가려는데, 어떤 놈이 희한하게 목욕가방을 손가락에 끼고 빙빙 돌리면서 내 앞을 지나가잖아. 그게 만홍이었지.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쳐서 인지 아는 얼굴인 거야. 만만한 것이 말을 걸어보고 싶더라고. “야, 너 이제 목욕탕 가나?”하고 물었지. 근데 만홍이가 엄청 화를 내더라고. “씨발놈아, 벌써 씻었다. 때깔 나는 거 안 보이나?” 그때 난 속으로 엄청 놀랬잖아. 씻었다는데 씻은 것 같지 않아서. 어찌 되었든 만홍이 화나는 모습에 내가 미안하다고 했어. “야. 내 지금 오락실 가는데 같이 갈래? 내가 게임 몇 판 시켜줄게.” 그러니깐 화난 얼굴이 금세 풀리더라고. 오락실 가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니깐 사는 곳도 가깝더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친구가 된 거야.
- 어휴. 지겹다. 지겨워.
- 인마. 이게 너와 나의 역사라고. “비긴스”라고. 빨리 가라. 부곡 하와이.
성규의 콩트는 역시 재미있다. 우리 모임 중에서 성규의 말솜씨가 최고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다. 그런 성규에게 만홍이는 단짝 중에 단짝이다. 속으로 성규와 단짝인 만홍이가 부럽다.
우리는 술 마시고 PC방에 스*크래프트 게임을 하러 갔다. 게임 도중 만홍이가 집에 일이 있다며 먼저 가버렸다. 게임이 끝나니 늦은 밤이다. 다른 친구들도 다 가고 나와 성규만 남았다.
늦은 시각에 버스가 안 다니므로 우리는 택시를 타기 위해 택시 정류장까지 걸어갔다.(그 당시는 스마트 폰이 없었던 시기였다.) 가는 도중에 성규가 내 어깨에 한 손을 걸쳤다. 초겨울 날씨라 덥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성규의 온기가 느껴졌다. 싫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그러니깐 민망스럽고 거부감도 들었다.
- 왜 이래?
- 잠시만. 친구야.
- 왜?
- 니 내 소원이 뭔지 아나?
말투가 갑자기 진지하게 바뀐 것을 보니 또 콩트가 시작되는가 보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맞장구쳐주었다.
- 뭔데? 니 소원?
- 택시 기사. 니 죽이고 싶은 사람 하나만 말해봐라. 아니 여러 명 이야기해도 된다. 그 놈들 다 죽여버리고 내 감옥 갈 수 있다. 니는 내한테 그런 존재다. 알겠나? 친구야!
순간 감동을 먹었다. 물 밀 듯이 벅차오르는 감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성규의 콩트는 계속되었다.
- 와? 반응이 없노? 감동 먹어서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나?
웃음을 나올 것 같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 친구야. 대신 내 감옥 나오면 택시 하나만 사줘라.
비록 콩트이기는 하나 진정성이 느껴졌다. 감동이 계속 올라오니 부끄럽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너 “친구” 엄청 재미나게 본 모양이구나.
- 그럼. 나는 영화 친구 OST도 샀다.
우리는 각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성규에겐 만홍이가 최고의 단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성규에게 절친인 것일까? 나를 위해 사람도 죽일 수 있다니 말이다. 물론 농담일 수도 있겠지만 가슴이 뿌듯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인생친구, 절친이라는 것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날 너무 기뻤다.
그 당시 성규가 자주는 아니지만 아버지 차를 몰고 다녔다. 어느 날 우리는 성규 아버지 차를 타고 타 지역의 놀이공원에 놀러 갔다. 그곳에서 재미나게 놀이기구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려고 다들 성규 아버지 차에 탑승했다. 성규가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운전석에 바로 따지 않고 만홍이가 있는 조수석으로 가더니 손바닥으로 창문을 미친 듯이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 친구야 내다! 내 친구야! 만홍아!
차 안에서는 웃음과 탄성이 섞어 흘러나왔다. 영화 “친구”에서 엘리트 대학생 친구를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는 주인공을 따라한 것이다.
며칠 뒤 나도 영화 “친구”를 봤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성규가 택시 정류장까지 가는 도중에 내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영화를 다 보니, 성규가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정말 많이 인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성규의 콩트가 떠올라 또 웃었다.
“친구”라는 영화가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깡패와 엘리트 대학생과의 친분.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우정. 그 사이에 일어난 배신과 절망. 어찌 되었든 영화를 다 보니 성규와 친구들이 떠올랐다. 인생이 누아르는 아니지만 내게도 영화 “친구”에서 나오는 인생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우리 모임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성규의 대학교 친구가 단체 미팅을 주선한 것이다. 진수가 일본유학을 가는 바람에 5대 5 단체 미팅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주말 저녁, 중심가에 위치한 고깃집에 모였다. 친구들과 함께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벌써 5명의 여대생들이 와있었다.
- 반갑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여대생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고 그 와중에 누가 이쁘고 별로인지를 정확히 분류했다. 친구들이나 내가 말을 잘 못해서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면 어쩌지’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성규가 분위기를 이끌었고 평소에 말 없던 만홍이도 여대생이 있어서인지 말이 많았다. 그럭저럭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루어졌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 여대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화장실로 갔다. 여대생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자, 우리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졌다.
- 너 누가 마음에 들어?
우린 다 섣불리 말을 내뱉지 못했다. 마음에 들어 하는 이성이 겹칠까 두려운 것이다.
- 마음에 들거나 호감 가는 것은 아닌데, 가운데 있는 여대생이 제일 예쁘고 재미있더라.
우리 친구들은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다시 말해 모두 가운데 앉은 여대생에게 호감이 가는 것이다.
- 그럼 네가 연락처 물어봐라.
- 아니다. 난 관심 없다. 그냥 인물이 제일 괜찮다는 것이지. 예쁘다고 호감 가는 것은 아니지.
우리는 서로에게 ‘연락처를 물어봐라, 관심 없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여대생들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결국 우리 친구들, 아무도 여대생들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친구들의 모습이 놀라웠다. 우정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것이라 여겼다. 여대생들과의 미팅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우정을 확인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난 그런 친구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웠고 내가 ‘참 좋은 친구를 사귄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