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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 쌈의 계절

by 런던 백수
따끈한 호박잎 위에 뜨끈한 깡장과 밥을 얹어 쌈을 싸 먹으면 입에 불이 난다. 불이 나긴 나는데, 요즘 매운 음식처럼 불만 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 깊숙이 구수하고 복잡하고 그리운 불이 난다. 다 식은 호박잎쌈과 깡장은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다. 일주일 내내 시원한 보리차를 끓여놓고, 매일 한 끼는 찬 호박잎쌈과 깡장을 꺼내 밥 싸먹고 보리차를 마신다.
권여선 [술꾼들의 모국어]


늙은 어머니는 여름이 되면 여린 호박잎을, 때로는 탁구공 만한 아기 호박까지 따다 찌셨다. 호박잎 쌈은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음식이다.


된장은 찌셨다. 멸치와 갖은 양념(한국어 아닌 다른 언어에도 이런 표현이 있을까?)을 섞은 된장을 쪄내면 짠맛은 좀 줄어드는 대신 감칠맛이 깊고 깊다.


이런 날 밥상은 평상이나 마루에 펴야 한다. 제멋대로 엉키고 접힌 호박잎을 한 장 한 장 편다. 갓 지은 따뜻한 밥을 한 숟가락 올리고 맛난 된장을 곁들인다. 예쁘게 쌈을 만들 여유가 이쯤 되면 없다. 대충 접은 호박잎 쌈을 입에 밀어놓고 씹으면 더위마저 가신다.


일일이 펴기가 귀찮아지면 밥 위에 접힌 호박잎을 그대로 올리고 그 위에 된장을 올려 먹으면 그만이다. 아주 더운 날엔 찬 밥을 물에 말아서 훌훌 마시듯 먹으며 호박잎에 된장을 찍어먹듯 해도 좋다.


매운 맛에 환장하는 권여선은 된장에 매운 고추를 잔뜩 넣는 모양이다. 맛있게 맵다,는 표현을 나는 좋아한다. 마라나 캡사이신 같은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면서도. 그래서 아마도 권여선의 깡장을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기는 해도.


마침 30도에 육박하는 더위가 시작되었다. 호박잎을 찾아 전통시장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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