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니까.

by 혜진

시골로 내려가신 그 주 주말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냥 큰 병원 가지 말고, 여기서 치료받을까?”

“또 왜 그러시는 데요? 왜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세요?”

“큰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으셨던 거 아니었어요? 동네 치과 진료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 아니냐고요?”


큰 병원 진료를 권한 건 나였다. 물론, 작은 병원이 마음에 안 들어 떠돌이 환자로 살아오셨고, 최근 건강검진도 시골 병원에서 받기 싫다고, 분당에 가서 받겠다고 하신 분이었다. 재작년에 동네 병원에서 수면 내시경을 받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깨워 내보냈다는 이유에서였다. 분당 어느 병원에서 받았을 때는 매우 친절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홀로 서울까지 오셨다. 친구분께서 대학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진료받으러 가 보신다고 하셨다.


데이터는 충분히 쌓였다. 아버지를 큰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게 나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블랙리스트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살고 계신 시골 동네 치과에서 진료를 받으시겠다고 전화하신 것이다. 짜증이 확 났다. 큰 병원에 모시고 가야 끝날 이야기였다. 아니,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실 것 아니에요? 큰 병원 진료가 필요하신 상황 아니에요?”

“아, 그래 그럼. 큰 병원에서 진료받을 게.”


아버지와는 소통이 잘 안 된다. 귀가 잘 안 들리시기도 하시고, 대화를 길게 못 하신다. 원래 이랬다 저랬다 결정을 잘 못하시기도 하신다. 남의 눈치를 많이 봐서 그렇기도 하다. 거기에 아픈 딸이 짜증을 내며 소리치고 있으니, 할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갑자기 또 끊으신다.


5분 있다가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아빠, 뭐라고 하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다. 아버지는 술 취해 집에 들어오셔서는 티브이며, 식탁 의자, 벽걸이 시계 등을 때려 부수곤 하셨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아니, 지금 동갑내기 남편과 혹은 동창들과 얘기를 해 보면, 그 당시 아버지들이 그랬던 게 유행인 것처럼 서로 비슷한 모습의 아버지들을 회상하곤 한다. 가부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당연한 사회에서, 점점 엄마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고, 의견을 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존재감이 무너질까, 폭력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내가 6~7살 때는 엄마가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근처 친척집으로 도망가서 옷장에 숨곤 하시다가, 우리가 조금 컸을 때는 아버지에게 맞서 싸우시곤 했다. 내가 보기엔 자존심 싸움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제발 이혼하시길 바랐다.


매일 밤이 싸우는 소리에 괴로웠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세심하지만 속이 좁고, 능력 없는 남편이었고, 아버지에겐 엄마는 극성맞고, 돈 밖에 모르고, 살림 제대로 못하는 아내였다. 부부싸움도 부부싸움이지만, 싸운 이후가 더 스트레스였다. 엄마는 ‘네 아빠’의 안부를 나를 통해 확인하려 했다. 같은 집에 살면서 말이다. 거기에 아빠가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지 나에게 죽일 것 같은 얼굴 표정을 하고 얘기해주곤 했다. 생각해 보면, 세심한 사람이 속이 좁고,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능력 없는 사람을 만나 극성맞아지고 극성맞게 일을 하다 보면 살림을 좀 놓칠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두 분의 인연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를 태어나게 해 준 ‘남과 여’의 주인공 이셨다. 40이 훌쩍 넘은 내 나이에, 한 가정을 이뤄 ‘남과 여’에서 ‘여’의 역할을 맡은 지 14년이 된 지금의 나는 아직도 두 분의 어린 딸에 불과하다. 엄마는 30년 넘게 같은 내용의 아빠 흉을 보신다. 대화의 끝은 아빠의 흉이다. 나에게 하셨던 얘기를 또 하시고, 또 하신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려 하지만, 아빠의 흉이 없는 적이 없었다. 내가 30대 초반이었을 때인가? 한 번은 울면서 부탁한 적이 있었다. 아빠 욕 좀 그만하라고. 그럴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딸이 그런 것도 못 들어주니?”

“네 남동생은 이 얘기하면 성질부려서 말도 못 하는데, 내가 친구가 있니, 뭐가 있니?

“가족이니까, 그런 얘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뭘 그런 걸로 울고 그래?”


가족이니까…


그렇게 10여 년 만에 난 다시 울부짖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날 괴롭혀!”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아버지와의 짧은 전화 통화 후, 아버지가 그렇게 시골로 내려가신 후, 엄마가 돈 때문에 아빠를 읍내 치과에서 치료받도록 회유했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 하시는 데, 왜 엄마는 그런 아빠를 그냥 두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아빠, 뭐라고 하디?”


뭐라고 했는지 설명할 틈 없이, 난 극도로 흥분했고,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일요일 오전 10시였다. 남편과 함께 예쁜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으며, 예능 프로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2달 전 남편과 싸우다가 “이 몸뚱이로 살고 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라고 소리치고 두 번째로 극한의 흥분을 느낀 순간이었다. 너무 흥분해서 내가 뭐라고 했는 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너무 놀라 우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엄마가 미안해.”

“너를 괴롭히려고 전화한 게 아니야.”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저 읍내 병원에 간다고 해서 따라왔다가, 너랑 통화하는 것 같길래.”

“엄마가 너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미안해, 정말. 이제 전화 안 할게.”

“진정해, 아가.”


내가 ‘괴롭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모양이다. 엄마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고, 아이 같이 엉엉 울면서 한마디 한마디를 겨우 이어 나가셨다. 항상 엄마의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주던 딸의 흥분한 모습을 처음 직면하여, 너무 놀라신 듯 보였다. 순간 나는 모두가 날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넌 행복해지면 안 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난 극한의 자괴감을 느낄 때마다 소리치고 있었다. 무기력한 나에게 무기력해지면 안 된다는 듯 모두가 나무라는 것 같았다. “치열하게 일하고, 욕하고 사는 게 뭐가 잘못된 건데?”, “넌 왜 그렇게 가만히 듣고 만 있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왜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헤아리려 하지 않고,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이 없으며, 무엇을 싫어하는지 따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그러고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쩌다 울부짖는 상태까지 오게 되었는 가?’


드디어 직면하게 된 내 모습이었다.


나 역시 피해망상에 허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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