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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Oct 06. 2023

예술과 동행한 루이 비통의 여정

도전과 혁신을 멈추지 않는 루이 비통이 걸어온 길

아트 마케팅의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기업은 예술 활동을 후원하거나 장려했다. 예술 분야와 전략적으로 제휴해 경쟁사와 차별화를 꾀하거나 국제화를 도모하고 예술의 보편성에 편승하는 것이 그 이면에 숨은 의도이기도 하다. 기업은 주주와 고객에게 예술, 지역사회와 문화를 동시에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예술과 손잡는다. 그중 럭셔리와 예술의 협업 공식을 도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루이 비통 사례를 살펴보자. 루이 비통은 전시와 이벤트 기획, 커미션 작품 의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방식으로 예술가와 꾸준히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1859년 이래 루이 비통의 맞춤 제작 스페셜 트렁크를 탄생시킨 프랑스 아니에르 공방(위)과 가문의 저택(아래). 제공: 루이 비통


루이 비통이 예술을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으로 삼기 시작한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행’을 하나의 모험으로 여긴 시대에 젊은 트렁크 제작자였던 창립자 루이 비통은 여행을 진정한 ‘삶의 예술(art de vivre)’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최초의 현대적 트렁크는 이후 시대를 초월해 여행자의 충실한 동반자로 거듭났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꾸준히 제품을 디자인한 루이 비통은 기술 못지않게 예술에도 관심을 보이며 파리, 브뤼셀, 런던, 빈 세계박람회에서 제품을 전시하고 1925년에는 파리 세계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 des Art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에 참가했다. 창립자의 아들 조르주 비통(Georges Vuitton)은 작고한 아버지를 기리며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에서 영감을 받아 1896년에 꽃 모양 디자인과 서로 맞물린 LV 이니셜을 섞은 모티브를 창조해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모노그램 패턴은 공개하자마자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이 트렁크 제작 전통을 여행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면 장식미술에 관심을 가진 손자 가스통-루이 비통(Gaston-Louis Vuitton)은 당대 최고의 아르데코 공예가, 유리 장인과 협력하며 예술 협업의 장을 열었다. 1980년대에 그의 후손이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aldaccini), 솔 르윗(Sol LeWitt) 같은 동시대 미술가와 텍스타일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선보이며 명맥을 이었다.


1928년 『보그』 매거진에 실린 루이 비통 트렁크(1928).


예술과 문학에 두루 조예가 깊은 가스통-루이 비통은 헤밍웨이 등 당대 지성인과 활발한 소통을 이어갔다. 1914년 샹젤리제 매장에 독서 라운지를 들인 이 박식한 수집가이자 애서가는 패션, 디자인, 건축, 역사, 여행, 예술 관련 양서를 제작한 루이 비통 출판사의 기틀을 마련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뛰어난 심미안으로 쇼윈도 디스플레이도 스스로 디자인한 그의 철학을 이어받아 루이 비통은 21세기에 쇼윈도를 매장으로 향하는 창으로 여기고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올라푸르 엘리아손(Olafur Eliasson)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1년 중 가장 매출 비중이 큰 크리스마스 시즌에 제품을 일절 노출하지 않고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작품 〈Eye See You〉를 전 세계 루이 비통 매장에 선보인 쇼윈도는 그 대담성 측면에서 손에 꼽을 만하다.


1996년에는 모노그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패션 디자이너 7인에게 그만의 색채를 가미하도록 전권을 위임하며 모노그램 캔버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년 후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가 아티스틱 디렉터로 합류, 예술 협업이라는 루이 비통의 오랜 전통을 본격적으로 되살리며 예술과 패션의 교류를 전례 없는 차원으로 드높였다.


이 시기에 컬래버레이션 역사에서 예술과 패션을 이례적인 방식으로 접목하는 데 성공한 기념비적 컬렉션이 연달아 탄생했다. 루이 비통은 예술을 향한 열정을 보여주고 럭셔리와 현대미술의 접점을 잇는 노력을 입증했다. 마크 제이콥스를 발탁해 패션에 감각적으로 예술을 더하고 예술가와의 협업을 전적으로 지원한 전 루이 비통 CEO 이브 카셀(Yves Carcelle)은 럭셔리와 예술이 ‘감정과 열정의 표출’이란 공통분모를 지닌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열정과 창의성,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를 더하는 속성을 공유하는 예술과 럭셔리는 교류의 접점을 늘려 경계를 전복하며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했다. 예술은 끊임없는 배움과 연마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럭셔리 전략과도 맞아떨어졌다.


파리에 있는 전시 공간 LV 드림(LV DREAM).


그럼에도 새로운 시도는 무릇 반대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2001년, 21세기의 포문을 여는 성명서를 방불케 한 마크 패션 디자이너 스테판 스프라우스(Stephen Sprouse)의 합작품 ‘LV 그래피티 컬렉션’은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신성시하다시피 한 모노그램 캔버스를 도화지 삼아 파격적인 그라피티로 변주를 꾀하는 선택에 경영진 일부가 극렬한 반대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테판 스프라우스가 2004년 안타깝게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미 단종된 시즌 컬렉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2009년 한층 펑키한 컬러를 앞세워 재출시하자마자 많은 이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평소 농담을 즐기는 예술가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가 지인에게 루이 비통과 일하게 됐다고 털어놓으며 “잘하면 빨리 은퇴할 수도 있겠어”라고 덧붙인 일화는 이 관계가 럭셔리 브랜드의 일방적 짝사랑만은 아님을 암시한다. 오늘날 국제적 명성의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사진작가와 루이 비통이 전개하는 협업은 어느 때보다 다채롭다. 아이코닉 모노그램 캔버스는 창작자의 도화지로 거듭나 새롭게 재해석된다. 2022년에는 박서보 화백도 아티카퓌신 가방에 〈묘법〉을 새겨 넣었다. 이 외에도 협업의 범위는 광고캠페인, 쇼윈도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 루이 비통 컬렉션을 심화한 예술 작품, 산업 디자이너와 협업한 오브제 노마드(Objets Nomades) 컬렉션, 전 세계 루이 비통 매장 건축물 등을 아우른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참여한 루이 비통 ‘아티카퓌신’ 컬렉션


2015년 5월 루이 비통은 광화문 디타워가 공식 운영을 시작하기 전, 공간을 대관해 당시 루이 비통 여성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의 두 번째 컬렉션을 테마로 《Louis Vuitton Series 2》전을 선보였다. 디타워에 새로운 문화 기관이 개관하냐는 문의도 있었다는 에피소드는 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럭셔리 브랜드에 모이는 많은 관심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건축과 미술에 대한 관심을 또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남프랑스 마그 재단 미술관(Fondation Maeght), 브라질 니테로이 현대미술관(Niterói Contemporary Art Museum), 오르세 미술관 등지에서 패션쇼를 개최하며 세계적 건축물과 문화유산에 경의를 표했다.


반면 ‘현대판 마르셀 뒤샹’, ‘21세기 르네상스 맨’으로 불리는 버질 아블로(Virgil Abloh)가 이끈 남성 컬렉션은 전통 범주화의 한계에 도전하고 패션, 예술, 디자인, 문화 전반에서 기존 위계질서의 틀을 깨는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시카고 현대미술관(MCA Chicago)은 아블로가 2021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기 전 2019년에 그의 작품 활동을 높이 평가해 지난 20년 동안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 비주얼 아티스트, 가구 디자이너, 뮤지션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활동한 그의 작품을 망라한 회고전 《Figures of Speech》를 개최했다. 루이 비통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몇 시즌에 걸쳐 디렉터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충분한 추모 기간을 거쳤으며 뒤이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올해 초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이는 혁신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 루이 비통의 행보와 일맥상통한다.


위 파리에 있는 전시 공간 LV 드림(LV DREAM). 아래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2014년 루이 비통은 파리에 현대미술을 비롯한 예술에 헌정하는 공간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을 개관, 럭셔리와 현대미술의 만남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식지 않는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을 견고히 했다. 이후 프랑스 문화사에 길이 남을 대형 전시를 집대성하며 파리 문화 예술계에 흥미로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미술관은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전 세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여섯 곳에서 전시를 열어 소장품을 더 많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는데, 서울에서는 9월 17일에 《신디 셔먼 온 스테이지-파트 II》 컬렉션 소장품 전시가 막을 내린다.


한편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1년 앞둔 10월 18일부터 4월 2일까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전시를 개최한다. 로스코는 자신이 화가가 된 이유로 “그림에 음악과 시만큼이나 강렬한 감정의 힘을 부여하기 위해”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끝없는 탐구심, 비언어적 대화를 향한 욕망, ‘색감 예술가’로 인식되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짚어내는 이번 전시에서 다시 한번 그의 다면적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Artnow Issue 43 (Fall 2022) SPECIAL Shared Growth: Art and Brand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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