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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Jul 08. 2024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를 기억하다

Greifswald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탄생 250주년인 올해, 그의 고향인 독일 북동부 발트해 연안에 자리한 작은 항구도시 그라이프스발트는 그 어느 때보다 들썩거리는 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1817. ©SHK / Hamburger Kunsthalle / bpk, Photo: Elke Walford.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라는 이름이 익숙지 않은 이에게도 안개 자욱한 바다를 앞에 두고 사색에 잠긴 방랑자의 모습은 기억에서 잊히기 어려운 인상적인 도상이다. 바위 절벽에 올라 간간이 보이는 산등성이와 부서지는 파도가 빚어내는 장엄한 광경을 향해 서 있는 이름 모를 신사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림 속 풍경에 순식간에 빠져들게 한다. 변화무쌍하게 너울거리는 바다처럼 끊임없이 요동치는 삶은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웅장한 자연 앞에 시선을 두고 지팡이에 삶의 무게를 실은 채 걸음을 멈춘 한 인간의 뒷모습은 솔직하면서도 꾸밈없다. 보는 자의 시선과 그림 속 인물의 시점은 서로 부분적으로 겹치고, 이내 골똘히 사색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관람객 또한 사유에 잠기도록 초대한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이 시대를 훌쩍 넘어 오늘날의 관람객과 밀접하게 감응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 풍광의 신비로움을 끌어내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인물의 뒷모습을 종종 그려, 꾸며낸 얼굴 표정, 앞모습이 결코 보여주지 못하는 진솔함을 비추고 자아를 탐색한 까닭이다. 기존 관습을 좇는 대신 풍경 속 인물의 뒷모습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과 새로운 시각을 추구한 거장이 아름답고 몽환적으로 그려낸 화폭은 그 너머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려 250년 전에 태어난 미술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그려낸 인물과 경관은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복하고, 그 거대함 앞에 때로는 고뇌하고 사색하는 존재인 현대인과도 시공간을 초월해 공명한다.


Chalk Cliffs on Rügen, 1818. ©Kunst Museum Winterthur, Courtesy of Pommersches Landesmuseum.


1774년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난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독일 연방정부가 예술사에 큰 영향을 미친 자국의 거장을 대대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2023년 12월 15일에 개막, 지난 4월 1일 막을 내린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술(Caspar David Friedrich: Art for a New Age)> 전시는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미술관 소장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를 앞세워 독일이 낳은 낭만주의 거장의 탄생 250주년 기념행사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독일 대통령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의 공식 후원으로 열린 전시는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베를린 국립미술관, 드레스덴 근현대 미술관 알베르티눔 등 독일의 주요 도시 대표 문화 기관에서 계속 이어진다. 2025년에는 작가의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프리드리히에게 헌정하는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라 더욱 화제다.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답게 독일 전역에서 전시와 문화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누구보다도 프리드리히 탄생 250주년을 반기는 도시는 바로 작가의 출생지인 그라이프스발트다. 전시는 물론 강연, 낭독, 연극, 영화, 음악회, 공공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관객을 아우르는 400여 개의 크고 작은 행사를 작가가 어린 나이부터 예술적 재능을 꽃피운 이 도시에서 선보인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엘데나 수도원의 폐허(Klosterruine). © Gudrun Koch.


그라이프스발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야외 전시장으로 거듭난다. 예로부터 대학 도시로 유명한 이곳에 동독 시절 방치되었던 구도심을 복원해 역사적인 시장 터, 옛 시가지 풍경이 프리드리히가 캔버스에 묘사한 자연, 삶의 모습을 간직한 채 이곳을 찾은 방문객의 눈앞에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낭만주의 거장의 그림에도 등장한 엘데나 수도원 폐허 역시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주요 산책로 중 하나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가가 살아생전 세례를 받은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에서는 지난 1월 20일 공식 개막 행사가 열린 데 이어 4월 7일 현대미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프리드리히의 ’Hutten’s Grave’를 모티브로 만든 모자이크 윈도 작품을 공개했다. 무료로 관람 가능한 이 작품은 동쪽 측랑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프리드리히가 사용한 색상 스펙트럼을 연상시키는 밝은 색채와 빛을 머금은 디자인을 입혀 대성당을 아름답게 감싸는 형상으로 빛을 발한다. 5월 포메라니아 주립 미술관에서는 거장의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고, 7월엔 이 지역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에서 프리드리히를 기리는 현대음악 작품을 초연한다.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Hutten’s Grave’(1823)를 모티브로 만든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 Gudron Koch.


2024년 9월 5일 생일을 맞이해서는 그라이프스발트 마르크트플라츠에서 케이크를 곁들인 생일 축하 파티가 열린다. 프리드리히가 한창 활동하던 18세기 후반, 도시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인 살롱 문화 역시 재현한다. 살롱 이브닝 시리즈로 재탄생한 이 프로그램은 기상학자가 이끄는 프리드리히 그림 속 날씨에 대한 살롱부터 그라이프스발트의 습지, 철학적 주제, 사회정치적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제공한다. 11월에는 암스테르담 조명 예술 컬렉션과 협업, 도시 곳곳을 밝힐 조명 예술 축제를 선보일 전망이다.


자연의 숭고함에서 비롯한 경외감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내 풍경화에 ‘새로운 시대의 미술’이 깃들게 하며 미술사에 주요한 획을 그은 프리드리히의 작품은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 미술가를 포함해 많은 후대 미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인용되었다. 이상화한 풍경, 역사적 장면을 그리는 전통적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 감정의 심오함, 나아가 존재에 대한 사색을 불러일으킨 프리드리히는 21세기 현대미술가에게도 꾸준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올여름 유럽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독일 북부의 소도시 그라이프스발트를 찾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작품에 담아낸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Courtesy of Anniversary Office “Caspar David Friedrich 2024 Greifswald.

Artnow Issue 46 (Summer 2024) CITY NOW GREIFSWALD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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