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빚어낸 무한 변주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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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태어나고 결실을 맺는 흙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크기의 제약에서 자유롭고자 했고, 색의 굴레라는 도예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변주를 멈추지 않은 신상호가 걸어온 여정의 시작은 언제나 흙이었다.


764de5c7bbda4ec1image8.jpg 신상호 작가. 사진: 김제원


신상호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1947~)는 1960년대부터 사회와 미술의 변화에 호응하며 독자적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시대의 변화와 내면의 예술적 탐구심에 따라 도자의 경계를 평면 회화와 조각, 설치, 건축의 경계로 확장하며 흙의 세계를 다채롭게 펼쳐왔다.


1960년대에 이천의 가마에서 시작된 그의 길은 재료의 속성, 예술적 자각을 따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흙의 세계에 새로움을 불어넣었다. 흙으로 빚고 불에 구워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전통과 현대의 갈등’ 속에서도 그는 저항하고, 기술적 문제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찾아 나섰다. 전통 도자, 도조, 건축 도자, 오브제, 도자 회화로 이어지는 그 탐구의 궤적은 한국 도예사에 독보적 지형을 새겼다. 스스로를 비워내고 실험으로 채워온 60년의 시간. 신상호는 흙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도전으로 가득 찬 생을 빚어왔다.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며 한국 현대 도예의 경계를 확장해 온 서사를 되돌아보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회고전 〈신상호: 무한 변주〉를 앞두고 양주의 미술관 겸 작업실을 찾아 거장과 마주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최대 규모의 도예가 개인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여든을 맞이합니다. 도예를 시작한 지 60년이 되었지요. 그 시기에 맞춰 이런 전시를 마련해 주신 게 너무 고맙습니다. 이번 전시가 단지 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 도예사가 한 사람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 왔는지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의 1000평 규모에서 열리는 회고전이라고 들었습니다. 한국 현대 도예사에 한 획을 그은 지난 60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천 수광리 도예촌에 공방을 세운 당시 분위기나 작업 환경은 어땠나요?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 남짓, 모든 것이 부서져 있던 시절입니다. 건물도, 그릇도, 도구도 남아 있지 않았죠. 그런 와중에 우연히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이천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 바로 정착하다시피 하며 흙과 만났습니다. 시기적으로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오직 흙만이 제 손에 남아 있었던 셈이지요.


말 그대로 흙이 도처에 있던 시기네요.

그랬죠. 그 시기에 시작해 60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전시 기획은 개인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 더욱 감사하지요. 다행히 1960년대 초창기 작품부터 새롭게 하는 작업까지 흩어지지 않고 다 가지고 있어요. 준비하면서 예전 작품들을 다시 보니, 참 욕심도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64409da7ca6687d6image3.jpg 아프리카의 꿈-머리, 혼합토, 가변 크기, 2000~2002.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정말 다작을 하신 작가이기도 하죠.

네. 변하기도 수없이 많이 변했어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시기였어요. 그러다 교환교수로 미국, 영국 등을 다니며 ‘남의 문화’에 대해서도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문화는 우리 것만 최고라고 할 수 없어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모든 문화를 두루 보고, 머릿속에 새겨 자기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게 작가의 역할이라 여깁니다.


국내 최초로 가스 가마를 도입하고, 공방 시스템을 구축하신 것도 선구적이었습니다. 당시 공방의 개념은 지금의 스튜디오와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원시적이었어요. 기술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아무 기반이 없었죠. 불을 때는 것조차 감으로 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과학’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가스를 이용해 장작 가마의 실패율을 줄이고, 온도나 시간 같은 변수를 제어하니 기술적 문제가 많이 극복됐죠. 도예는 생활과 밀접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매 시기 그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또 그걸 좇아 여기까지 왔네요. 돌이켜보면 기가 막혀요.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오셨네요. 도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술 중 하나이기도 하죠. 전통과 과학의 접목이야말로 작가님 작업의 핵심 축 같습니다.

제가 시작할 때는 ‘도예가’라는 말도 없었어요. 그냥 ‘옹기쟁이’였죠. 집안에서도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흙을 만질 때 느끼는 감각이 강하게 와닿았습니다. 어릴 때 흙장난하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이거다’ 싶었어요. 그렇게 평생을 내가 갈 길이라고 마음먹었죠.


0322534754e00a1cimage7.jpg 구조와 힘-말, 혼합토, 65×90×30cm, 2000~2010.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다 1981년에 홍익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셨죠. 현장에서 학교로 옮기며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그때까지 교수로 일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일본에서 이름이 알려지다 보니 학교에서 초빙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교수로서 가장 고민한 건 ‘어떻게 학생들이 자기 길을 찾도록 도와줄까’였습니다. 기술만 가르칠 수는 없어요. 정신적 태도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도예는 ‘쓰임’과 ‘아름다움’을 함께 지닌 공예예요. 순수 미술이 상상의 표현이라면, 공예는 실용에서 출발하죠. 제자들에게 그 차이를 이해시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융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이었습니다.


도예의 본질이 쓰임에서 시작된다고 보시나요?

공예는 쓰임새가 먼저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디자인 개념과 순수 미술 개념이 결합되었습니다. 나는 흙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살아왔고, 그것이 조형적이고 회화적인 영역까지 확장됐습니다. 아직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회화적 도자 작업도 전시에서 선보입니다. 먼 훗날 어떻게 평가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한눈에 보여줄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작업의 전환점이 된 시기가 여러 차례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1986년, 전통 도자기에서 벗어나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죠. 1m가 넘는 큰 형태,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도자 조각을 선보였어요. 미국 교환교수 시절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귀국 후 연 전시였습니다. 전시를 마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 안에 내 근원이 있는가?” 없더군요. 내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8069cb51f3972b8eimage2.jpg (왼쪽) 분청, 혼합토, 분장, 40×35×35cm, 1994. (오른쪽) 구조와 힘-민화말, 혼합토, 52×48.5×14.5cm, 2012.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그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분청’이 단서가 되었죠.

분청은 도자를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전통 기법이거든요. 그러다가 1995년 영국 왕립예술대학에 교환교수로 머물면서 아프리카 대륙 전시회를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형식보다 생명력이 먼저였죠. 그 조각과 가면들은 누가 가르쳐서 만든 게 아니라, 삶 그 자체에서 나온 예술이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예술의 원형이구나.” 한국의 샤머니즘 역시 결국 원시미술과 맞닿아 있죠. 원시미술의 뿌리가 제 ‘드림’ 시리즈 작업에도 있었던 거죠.


그 경험 이후 아프리카를 직접 찾아가셨다고요.

20년 가까이 아프리카를 쫓아다녔어요. 원시미술의 근원을 보고 싶어서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가 없는데, 막상 진짜 작품은 대부분 이미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런데 동물들이 초원에서 막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그 역동성에서 생명의 발산을 느꼈죠.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세계 도예가들을 초청해 국제 워크숍을 여셨는데요.

그때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전통은 훌륭하지만 현대 도예는 없다”고 평했어요. 그 말을 듣고 열불이 났죠. 정부 지원을 받아 직접 세계 도예가들을 초청했습니다. 워크숍 장소는 제 양주 작업장이었고요. 함께 먹고 자며 흙으로 형태를 빚고, 서로 가르치고 배웠어요. 한국 현대 도예의 첫 국제무대였죠.


이후에도 국제 도자 문화 확산에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 흐름이 2001년 이천 세계도자기엑스포로 이어졌고, 2004년에는 김해 클레이아크 개관에도 참여했습니다. 전통 도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도예와 건축이 만나도록 길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6b4bed4b0e6dff88image10.jpg 구운 그림-미래 도시를 감싸며, 혼합토, 250×1600cm, 2008.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이후 ‘조각과 회화 사이의 도자’를 시도하셨습니다. 흙을 다른 재료로 확장하는 시도였죠.

흙은 조각이 될 수도, 회화가 될 수도 있어요. 흙은 살아 있는 물질이에요. 물을 만나면 이어지고, 불을 만나면 돌이 됩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이 언제나 저를 이끌어왔습니다. 이후 금속, 유리, 나무와도 결합을 시도했죠. 산업혁명 이후 버려진 재료들을 흙과 결합시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흙이라는 매체의 미래 가능성은 말로 다 못해요. 무궁무진하죠.


‘구운 그림(Fired Painting)’이라는 새로운 개념도 제시하셨습니다. 어떤 생각에서 비롯한 건가요?

캔버스는 실내에만 걸 수 있잖아요. 저는 야외에서도 견디는 그림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자 회화, 즉 구운 그림을 생각했죠. 불로 구운 색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색도 더 깊고요. 이후 그 회화적 감각이 건축 도자로 발전했습니다.


지금은 김해의 명물이 된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도 그렇고, 건축 도자는 또 다른 도전의 연속이었을 것 같습니다.

내구성을 극복해야 했지요. 무수히 많은 시도를 거쳤어요.


현실적 제약을 계속해서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창작의 일부로 느껴지는데, 관심사도 정말 다양합니다. 수집도 그중 하나죠. 수집을 서양에서는 일종의 ‘병’으로 봐요. 안 하면 아프다는 식이죠. 저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물건으로 모으고, 그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요.


907ab987a93f0479image5.jpg 묵시록-적(赤), 소(素), 흑(黑), 혼합토, 알루미늄 패널, 각 130×163×3cm, 2022.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물에 대한 관심이 오브제 작업으로 이어지고, 취미와 일, 삶이 작가님의 작품처럼 한데 융합되는 것 같습니다.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만 꼽으신다면요?

흙이에요. 흙으로 시작해 흙이 다른 무언가를 만나는 거죠. 최근작 ‘묵시록’에서도 결국 흙이 캔버스로 올라와요. 흙을 구워 캔버스를 만들고, 프레임을 알루미늄으로 바꾸니 가벼우면서도 견고함을 더해요. 색이 내면화되는 구조를 보여주는 거죠.


지난 60여 년간 작가님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창작은 실패를 포함한 과정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늘 도전합니다. 엎었다 제쳤다, 다시 엎었다 제쳤다 하면서 나아갈 수밖에요. 새로운 것을 하지 않으면 답답해요.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면 결단을 내리고 도전해야 돼요. 그러다 보면 길이 열리고, 답이 나와요.


Artnow Issue 52 (Winter 2025) ARTIST&PEOPLE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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