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자본주의 직관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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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마존 창고 노동자 한 명이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려고 페트병에 소변을 보았다는 뉴스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21세기 최첨단 기술 기업에서 벌어진 이 일은 마치 19세기 공장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154년 전,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예견했던 바로 그 장면들 말이다.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를 해부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부품으로 만들고, 어떻게 부와 빈곤을 동시에 생산하며, 왜 주기적으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를 밝혀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극심한 불평등, 반복되는 경제위기, 기후변화, 그리고 팬데믹까지도 마르크스의 분석틀 안에서 놀랍도록 명쾌하게 설명된다.

하지만 『자본론』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 모순 자체가 어떻게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산력과 사회적 협력이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토대가 된다는 변증법적 통찰이 바로 『자본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분석은 상품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 한 잔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스타벅스에서 5,000원을 주고 산 아메리카노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 안에는 콜롬비아 커피농장의 노동, 운송회사의 물류, 매장 직원의 서비스, 그리고 스타벅스라는 브랜드의 이미지까지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런 상품의 신비로운 성격부터 분석을 시작했다.


모든 상품은 이중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용가치 즉,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실용적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교환가치, 다른 상품과 바꿀 수 있는 사회적 힘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목적이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 즉 이윤이라는 점이다. 이로부터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시작된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보다는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지가 생산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주리는 동안 유럽에서는 잉여 농산물을 폐기한다. 코로나19 백신도 마찬가지다. 기술적으로는 전 세계 인구에게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지만, 특허권과 이윤 때문에 수십억 명이 백신을 맞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더욱 놀라운 사실은 "상품 물신주의"다. 상품들 사이의 교환관계가 마치 자연법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 숨은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다. 금이 돈이 되고, 주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신의 뜻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모두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된 사회적 약속일 뿐이다. 비트코인 열풍에서 우리는 이런 물신주의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목격했다.


그렇다면 자본가의 이윤은 정확히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경제학의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만약 모든 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즉 모든 상품이 그 가치대로 팔린다면 자본가의 이윤은 어디서 나오는가?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천재적 통찰은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상품은 다른 상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생존하고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데 드는 비용으로 결정되지만,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해내는 가치는 그보다 훨씬 크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8,720원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하루 8시간 일하면 약 7만원을 받는다.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생이 하루 동안 판매한 상품의 총 이익은 얼마일까? 대형 편의점의 경우 하루 매출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가 많고, 순이익률을 20%로 잡아도 40만원이다. 물론 임대료, 전기세 등 다른 비용들도 있지만,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와 받는 임금 사이의 격차는 명백하다.

이 차이가 바로 잉여가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하루 중 일부 시간(예를 들어 4시간)은 자신의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생산하고, 나머지 시간(4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무료로 일한다고 분석했다. 이를 각각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플랫폼 경제는 이런 잉여가치 추출을 더욱 교묘하게 만들었다. 우버 기사는 "자영업자"라는 이름으로 고용되지만, 실제로는 우버라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잉여가치를 제공한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창작 노동이 구글에게 막대한 광고수익을 가져다주지만, 정작 크리에이터들이 받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착취의 메커니즘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더욱 정교해진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법칙 중 하나는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한쪽에서는 부의 축적이, 다른쪽에서는 빈곤의 축적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개별 자본가의 악의가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하고 생산성을 높인다. 더 적은 노동자로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다. 그 결과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불안정한 고용에 내몰린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렀다. 이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자본에게 두 가지 이득을 준다.

첫째, 임금 인상 압력을 억제한다. 실업자들이 언제든 일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어렵다.

둘째, 경기 변동에 따라 노동력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을 보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정규직은 줄어들고 비정규직은 급증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비정규직 비율은 약 37%에 달한다. 동시에 재벌 대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2021년 사내유보금이 122조원에 달했고, 2022년에는 145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한쪽 극에서의 부의 축적, 다른 쪽 극에서의 빈곤의 축적"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기술 발전이 이런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지만, 그 혜택은 소수의 기술 기업에게 집중된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하루 만에 130억 달러를 벌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모순들이 누적되면서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위기에 빠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의 악순환. 자본주의는 왜 이렇게 주기적으로 위기에 빠지는 걸까? 마르크스는 이미 150년 전에 그 답을 제시했다.

첫 번째 모순은 과잉생산 위기다. 개별 자본가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임금을 낮추려 한다. 하지만 모든 자본가가 동시에 그렇게 하면 사회 전체의 구매력이 떨어져 생산한 상품을 팔 수 없게 된다. 생산능력은 늘어나는데 유효수요는 줄어드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일을 보자. 정부의 대규모 재정지원으로 소비가 급증하자 기업들은 "인력 부족"을 호소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동안 임금을 너무 낮게 책정해놨기 때문이었다. 시간당 15달러 이상을 제시하자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정확히 보여준다.

두 번째는 이윤율 저하 경향이다. 자본가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계와 설비(불변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인간 노동(가변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 그런데 잉여가치는 오직 살아있는 노동에서만 창출되므로, 장기적으로는 이윤율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바로 이런 현상의 대표적 사례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기업들은 막대한 자본을 설비투자에 쏟아붓고 고용은 줄였다. 그 결과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전체적인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됐다. 기업들은 현금을 쌓아두기만 할 뿐 투자를 기피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

세 번째는 금융화의 문제다. 실물경제에서 충분한 수익을 얻기 어려워지자 자본은 점점 더 금융 영역으로 몰린다. 하지만 금융 자체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결국 실물경제와 괴리된 금융 버블이 형성되고, 이는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그랬고, 최근의 각종 코인 사태도 마찬가지다.


이런 위기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경험하는 소외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자신이 생산한 상품으로부터의 소외.

둘째, 생산행위 자체로부터의 소외.

셋째, 인간 본질(자유로운 창조적 활동)로부터의 소외.

넷째,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의 소외.

현대 자본주의에서 이런 소외는 더욱 정교하고 광범위한 형태로 나타난다. IT 기업의 프로그래머를 생각해보자. 그는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세분화된 업무를 반복한다. 전체 프로젝트에서 자신이 맡은 부분이 어떤 의미인지, 최종 사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어렵다. 자신이 만든 코드의 소유권도 회사에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감정노동의 확산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억누르고 고객이 원하는 감정을 연기해야 한다. "고객은 왕"이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인격적 모독까지 감내해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소외다. 플랫폼 노동은 소외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배달 라이더들은 앱의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과 다름없다. 자신의 업무 시간, 동선, 심지어 쉬는 시간까지 플랫폼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서도 "자영업자"라는 이름으로 모든 위험은 개인이 떠안는다.

이런 소외는 정신 건강의 위기로 이어진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의 현실, 미국 청년층에서 급증하는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소외의 결과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들을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기술에 대해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기계가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기술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비판했다.

현재의 디지털 혁명은 이런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은 인간을 반복적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주 15시간만 일해도 현재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기술 발전으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살아남은 일자리는 더욱 강도 높게 착취당한다.

아마존의 창고를 보자. 최첨단 물류 시스템과 AI가 도입됐지만, 노동자들의 작업 강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알고리즘이 실시간으로 작업 속도를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즉시 경고가 온다. 기술이 노동자를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더욱 정교하게 통제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플랫폼 경제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하나로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자유'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24시간 대기 상태로 만들었다. 배달 라이더들은 밤늦게까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일해야 한다. 기술이 노동의 유연성을 높인 게 아니라 노동자의 전 생애를 자본에 종속시킨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모순이 결국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력과 사회적 협력 자체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위키피디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등은 이미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재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 시대에는 환경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분석틀은 현재의 기후위기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의 무한 축적 욕구와 지구 생태계의 한계 사이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성장을 멈출 수 없다. 성장하지 않으면 이윤율이 떨어지고 경쟁에서 도태된다. 하지만 무한 성장은 유한한 지구에서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는 매년 지구가 재생할 수 있는 자원을 8월경에 모두 소진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외부효과(externality)다. 기업들은 자신의 이윤은 사유화하지만 환경오염과 같은 비용은 사회에 떠넘긴다. 석유회사들은 1970년대부터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은폐하고 오히려 기후변화 부정론을 퍼뜨렸다. 개별 기업의 이윤과 인류 전체의 생존이 상충하는 극단적 사례다.

현재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나 ESG 경영도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지만, 결국 환경 자체를 상품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해결책은 생산의 목적을 이윤이 아닌 사회적 필요와 생태적 지속가능성으로 바꾸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르크스의 예측 중 상당 부분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점자본의 형성, 금융자본의 지배, 세계시장의 확대, 주기적 경제위기, 불평등 심화, 노동의 불안정화 등이 그것이다. 구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의 규모가 실물경제의 몇 배에 달하며, 중산층의 해체와 비정규직의 확산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예견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20세기 복지국가의 등장으로 노동조건이 상당히 개선되었고, 중산층이 확대되기도 했다. 또한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모색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자본론』이 위대한 저작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영국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이나 돌봄 노동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환경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던 19세기에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식민지와 인종 문제가 갖는 의미나 국가가 경제에 직접 개입하고 복지를 제공하는 복합적 역할도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 이런 한계들은 마르크스 이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완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본론』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방법론과 문제의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자본론』을 읽는 것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154년 전의 텍스트에서 오늘날의 현실을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존 창고의 노동자, 플랫폼 라이더, 스타트업의 개발자 모두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자본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실 진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산력과 사회적 협력 자체가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우리는 이미 그런 징조들을 목격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전 세계 과학자들이 협력해 1년 만에 백신을 개발한 것,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인터넷의 기반이 된 것, 위키피디아가 전통적인 백과사전을 대체한 것 등은 모두 협력적 생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본소득 실험, 노동시간 단축, 플랫폼 협동조합 등의 시도들도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들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언급한 "자유의 왕국", 필요노동시간을 최소화하고 자유시간을 최대화하는 사회가 점점 현실적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물론 이런 변화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본론』은 변화의 청사진이 아니라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한 나침반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본론』이 던지는 근본적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산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기술 발전의 혜택은 누가 누려야 하는가? 어떤 사회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여전히 우리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경제이론이 아니라 인간해방의 가능성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함으로써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54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길은 여전히 우리 앞에 열려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자본론』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미완의 프로젝트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 작업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우리 시대의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의 통찰을 발전시키고, 그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해답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본론』을 진정으로 읽는 방법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_%EB%A7%88%EB%A5%B4%ED%81%A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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