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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피의 세금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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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6월 15일,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탄 마흐무드 2세의 명령 하에 수천 명의 예니체리들이 학살당했다. 한때 오스만 제국을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만들어낸 바로 그 예니체리들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길조로운 사건(Vaka-i Hayriye)'이라 불린 예니체리 해체의 순간이었다. 창조자가 피조물을 파괴하는 이 비극적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의 구원자였는가, 아니면 파멸자였는가?

예니체리(Yeniçeri)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새로운 군대'라는 뜻의 이 터키어는 14세기 오스만 제국이 전통적인 부족 기반 군사 체계를 넘어서려던 혁명적 의지를 담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군사 조직을 넘어 오스만 제국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독특한 존재였다.

예니체리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데브시르메(Devşirme)' 제도부터 살펴봐야 한다. 1380년대부터 1648년까지 예니체리들은 이 제도를 통해 충원되었다. 데브시르메는 일종의 '피의 세금'으로, 40가구당 한 명의 기독교도 소년을 징집하는 제도였으며, 대상은 보통 8세에서 20세 사이였다. 술탄의 관리들이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마을을 순회하며 건강한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들은 가족과 고향을 영원히 떠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술탄의 노예가 되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데브시르메는 명백한 인권 침해였다. 그러나 당시의 맥락에서 이 제도는 놀라운 사회적 역동성을 창출했다. 기독교 농민의 아들이 제국의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으며, 많은 이들이 군인이나 장교가 되었고, 심지어 정부 각료, 지방 총독, 대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 때문에 일부 가족들(무슬림 가족들 포함)이 자발적으로 아들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혈통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통치 철학의 산물이었다.

선발된 소년들은 아랍어를 배우고 엄격한 훈련 과정을 거쳤다. 신체적 단련은 물론이고 오스만 터키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를 익히고, 이슬람 신학과 법학, 그리고 군사 전술을 학습했다. 가장 우수한 인재들은 궁정에서 행정관으로 양성되었고, 나머지는 예니체리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이 받은 교육 수준은 당시 유럽 어느 나라의 군인들보다 높았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예니체리들은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1453), 모하치 전투(1526), 빈 공성전(1529, 1683) 등 오스만 제국의 주요 군사적 승리에는 항상 예니체리들이 있었다. 이들의 강함은 단순히 개인의 용맹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첫째, 화기의 조기 도입과 숙련된 운용이었다. 예니체리들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화승총을 대규모로 운용한 보병 부대였다. 당시 유럽의 기사들이 여전히 창과 칼에 의존하고 있을 때, 예니체리들은 이미 총포와 대포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둘째, 엄격한 규율과 집단 결속력이었다. 예니체리들은 베크타시 수피 교단의 영향을 받아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을 했다. 결혼이 금지되었고, 부대 내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이들의 상징인 '카잔(가마솥)'은 단순한 취사도구가 아니라 형제애와 연대의 상징이었다. 카잔을 뒤엎는다는 것은 곧 반란의 신호였다.

셋째, 능력주의에 기반한 승진 체계였다. 혈통이나 출신보다는 실력과 충성도에 따라 승진이 결정되었다. 이는 조직 내 경쟁을 촉진하고 전투 의지를 높였다.


그러나 성공이 예니체리들을 변화시켰다. 16세기 후반부터 이들은 순수한 군사 조직에서 정치적 이익 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계기는 1566년 술레이만 대제의 죽음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통제력을 가진 술탄의 부재는 예니체리들에게 정치적 공간을 제공했다.

예니체리들의 정치 개입은 처음에는 미묘했다. 새로운 술탄의 즉위식에서 '추가 급여'를 요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대재상의 해임을 압박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이들의 요구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이 되었다. 1622년에는 오스만 2세를, 1648년에는 이브라힘을 폐위시키고 살해하기까지 했다. 술탄조차 예니체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우선 데브시르메 제도가 1648년 폐지되면서 순수한 데브시르메 출신의 비율이 줄어들었다. 또한 결혼 금지 규정도 사실상 무력화되어 예니체리들이 가족을 이루고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직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기득권 의식을 강화했다.

경제적 요인도 중요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이 둔화되면서 전쟁을 통한 전리품 획득 기회가 줄어들었다. 대신 예니체리들은 평시에 상업 활동에 종사하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이들은 길드를 장악하고 독점권을 행사하며 일반 상인들과 경쟁했다. 군인이자 상인인 예니체리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와의 연이은 패배, 오스트리아에게 헝가리 상실, 해군력의 절대적 열세 등이 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에 셀림 3세와 마흐무드 2세 같은 개혁 지향적 술탄들이 서구식 군제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예니체리들은 이러한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다.

예니체리들의 개혁 반대는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이는 그들의 존재 기반 자체에 대한 위협이었다. 서구식 신식 군대가 창설되면 예니체리들의 군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정치적, 경제적 특권까지 모두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적 정통성까지 동원하여 개혁을 '이슬람적 전통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저항했다.

1807년 셀림 3세가 추진한 '신질서(Nizam-i Cedid)' 개혁이 예니체리들의 반란으로 좌절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예니체리들은 울레마(이슬람 법학자)들과 연합하여 셀림 3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개혁 정책을 모두 폐기했다. 이들은 '전통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마흐무드 2세는 전임자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신중하고 치밀하게 예니체리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먼저 예니체리와 대립하는 세력들을 규합했다. 보스포러스포수(Bosphorus Artillery Corps)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여 예니체리에 맞설 무력을 확보했고, 울레마들을 회유하여 종교적 정당성을 얻었다.

1826년 5월, 마흐무드 2세는 '승리군(Asakir-i Mansure-i Muhammadiye)'이라는 새로운 군대 창설을 발표했다. 예상대로 예니체리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당시 약 135,000명의 예니체리 중 대부분이 마흐무드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6월 14일, 콘스탄티노플의 예니체리들은 히포드롬에 집결하여 술탄에게 불만을 표명하고자 했다. 이들은 전통적 반란 방식에 따라 카잔을 뒤엎고 술탄 퇴위를 요구하며 봉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마흐무드 2세는 미리 준비된 계획에 따라 반란군에 항복을 요구했고, 이들이 거부하자 대포를 이용해 예니체리들의 막사에 포격을 가했다. 수천 명의 예니체리들이 학살당했으며, 6,000명 이상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추방되거나 감옥에 갇혔다. 많은 역사가들은 마흐무드 2세가 의도적으로 예니체리들을 자극해 반란을 유도했다고 본다. 이를 술탄이 예니체리에 대해 벌인 '쿠데타'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500년간 지속된 예니체리 제도는 하루 만에 완전히 소멸했다.


예니체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기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예니체리가 없었다면 오스만 제국이 3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중세의 종료와 근세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예니체리들이었다.

또한 예니체리 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능력주의 시스템이었다.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하고,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며,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는 혈통 중심의 봉건제가 지배적이던 중세 유럽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예니체리들의 어두운 면 역시 분명하다. 데브시르메라는 강제 징집 시스템은 수많은 가족을 파괴했고, 동시에 오스만 통치에 대한 트라우마와 원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제국의 발전을 저해했다. 특히 18-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쇠퇴에는 예니체리들의 보수적 저항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예니체리들이 해체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서구를 따라잡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이는 예니체리들의 몰락이 단순히 하나의 군사 조직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 전체의 근본적 전환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니체리의 역사는 권력의 속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제국을 강대하게 만든 바로 그 힘이 결국 제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예니체리는 권력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칼날'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운명'이기도 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예니체리의 몰락은 불가피했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기득권 집단의 필연적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단순히 '역사의 걸림돌'로만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예니체리들 역시 자신들의 생존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예니체리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던진다. 어떤 제도나 조직도 영원불변할 수는 없으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그것을 창조한 자와 피조물 모두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권력의 균형과 견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1826년 6월의 그 아침, 이스탄불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히 하나의 군사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료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예니체리들의 마지막 함성과 함께 중세적 오스만 제국이 막을 내리고, 근대적 개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이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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