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대왕-바이킹 최후의 정복왕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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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넘도록 영국 민담에는 바다 앞에 앉아 파도에게 멈추라 명령했다는 어느 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화를 교만한 군주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긴다. 하지만 12세기 헨리 오브 헌팅던이 처음 기록한 이 이야기의 진짜 의미는 정반대다. 크누트 대왕은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권력이 무한하지 않음을, 오직 신만이 자연을 다스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역설적인 일화는 크누트라는 인물의 본질을 정확히 담아낸다. 그는 잔혹한 정복자이자 현명한 통치자였고, 바이킹의 후예이자 기독교의 열렬한 수호자였으며, 북해 제국이라는 전례 없는 권력을 건설한 인물이었다.


990년경 덴마크 왕실에서 태어난 크누트는 당대 가장 두려운 바이킹 지도자 중 한 명인 스베인 포크비어드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986년 자신의 아버지 하랄 블루투스를 전투에서 죽이고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 크누트의 어머니는 폴란드 공주로 추정되는 군힐드였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3세기 아이슬란드 문헌 플라테야르보크에 따르면 크누트는 어린 나이부터 전설적인 욤스바이킹의 지도자 토르켈에게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당대의 기록들은 그를 잘생기고 활력 넘치는 젊은이로 묘사하며, 탁월한 전사이자 전쟁에 재능이 있는 인물로 평가한다.


1013년, 크누트는 아버지의 잉글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당시 잉글랜드를 다스리던 에셀레드 2세는 "무책임한 자"라는 별명답게 패닉에 빠져 노르망디로 도망쳤다. 불과 몇 달 만에 스베인은 잉글랜드 왕이 되었고, 크누트는 게인즈버러에 주둔한 함대와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은 예측 불가능했다. 1014년 2월, 스베인은 왕이 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 에셀레드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크누트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덴마크로 철수해야 했다.


많은 지도자들이 좌절했을 상황에서, 크누트는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재기를 준비했다. 덴마크로 돌아간 그는 형 하랄드 2세가 왕위를 차지한 것을 받아들이고 공동 통치를 제안했다. 이 정치적 타협은 그의 실용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는 당장의 권력보다 장기적인 목표에 집중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1015년 여름, 크누트는 준비를 마치고 약 10,000명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잉글랜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에셀레드의 통치는 위기에 처했고, 대네겔드라 불리는 막대한 조공을 바이킹에게 바쳤음에도 침략은 계속되었다. 1002년 에셀레드가 명령한 성 브리스의 날 학살 사건에서 잉글랜드에 거주하던 덴마크인들이 대거 살해되었고, 이는 바이킹의 복수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우스터의 존은 에셀레드의 통치 기간을 "재발하는 조공, 실패한 대응책, 분열된 지도력"이 특징이었다고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왕국 북부를 장악했다. 부자간의 갈등은 잉글랜드의 통일된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016년 4월 23일, 에셀레드가 사망했다. 런던 시민들은 에드먼드를 왕으로 선포했지만, 사우샘프턴의 위탄 회의는 크누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잉글랜드는 사실상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해 내내 두 지도자는 펜셀우드, 셔스턴, 브렌트퍼드, 옷퍼드에서 연이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에드먼드는 용맹한 전사였고 "아이언사이드"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싸웠다. 하지만 크누트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전략가였다.


1016년 10월 18일, 두 군대는 에섹스의 아산둔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전투를 간결하게 기록한다. "양측에서 큰 살육이 있었다. 에드먼드 왕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웨섹스로 갔고, 크누트는 전장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문장 뒤에는 배신과 피의 드라마가 숨어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에드먼드는 전선에서 직접 싸우며 부하들을 고무했다. 잉글랜드군은 초기에 고지를 점령하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전투의 판세를 뒤바꾼 것은 무기가 아니라 배신이었다.


머시아의 얼도만 이드릭 스트레오나가 전투 도중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이탈했다. 우스터의 존은 나중에 "이드릭의 배신으로 덴마크인들이 승리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이드릭은 이미 여러 차례 편을 바꿔왔다. 크누트가 1015년 처음 상륙했을 때 그는 덴마크 편에 붙었고, 옷퍼드 전투에서 크누트가 패배한 후에는 다시 에드먼드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산둔에서의 이탈은 결정적이었다. 잉글랜드군의 전선이 무너지자 패닉이 퍼졌고, 에드먼드는 용맹하게 싸웠지만 결국 퇴각해야 했다. 연대기는 "잉글랜드 민족의 모든 귀족들이 그곳에서 멸망했다"고 한탄한다. 도체스터 주교 이드노스를 포함한 수많은 귀족들이 전사했다.


아산둔 이후, 두 왕은 글로스터셔의 데어허스트 근처 올니 섬에서 만났다. 귀족들의 중재로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테임스 강 이북은 크누트가, 이남의 웨섹스는 에드먼드가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생존자가 전 잉글랜드를 통치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크누트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1016년 11월 30일, 에드먼드가 사망했다. 동시대 사료들은 사망 원인을 명시하지 않는다. 일부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었다고 추정하고, 11세기 말 브레멘의 아담은 독살을 주장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크누트는 이제 잉글랜드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새로운 왕이 된 크누트의 행보는 놀라울 만큼 신중하고 전략적이었다.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장기적인 통치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결정은 에셀레드의 미망인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한 것이었다. 이 결혼은 여러 면에서 전략적이었다. 엠마는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의 누이였고, 그녀와의 결혼은 노르망디가 망명 중인 에셀레드의 아들들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동시에 이 결혼은 크누트의 왕위를 정당화하고 덴마크 왕가와 앵글로색슨 왕가를 하나로 묶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네 개의 백작령으로 나누었다. 웨섹스는 자신이 직접 통치했고, 동앵글리아는 토르켈에게,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의 에릭 하콘손에게, 머시아는 이드릭 스트레오나에게 맡겼다. 하지만 이드릭은 자신이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크누트에게 "제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왕께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누트의 반응은 냉혹했다. 1017년 크리스마스, 이드릭은 크누트의 명령으로 참수당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크누트는 "그가 받을 만한 대로 보상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처형은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배신자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경고와, 크누트가 오직 자신의 조건으로만 통치한다는 선언이었다.


크누트의 통치는 앵글로색슨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균형을 이루었다. 그는 에드거 왕이 제정한 법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는 잉글랜드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동시에 그는 덴마크와 앵글로색슨 귀족들을 요직에 골고루 배치하여 두 집단 간의 긴장을 완화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크누트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는 50년 후 노르만 정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기독교 신앙은 크누트 통치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의 조부 하랄 블루투스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아버지 스베인은 한때 배교했다가 다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크누트는 2세대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적 이유뿐만 아니라 진정한 신앙심에서 교회를 지원했다. 그는 교회에 막대한 기부를 했고, 켄터베리, 윈체스터, 피터버러의 주요 교회 중심지에 금, 토지, 성유물을 헌납했다. 샤르트르의 주교는 크누트의 선물을 받고 이렇게 썼다. "당신이 보낸 선물을 보았을 때, 우리는 당신의 지식과 신앙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이교도 왕자라고 들었던 당신이 이제는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와 종들에게 가장 관대한 기부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018년, 크누트의 형 하랄드 2세가 사망했다. 크누트는 즉시 덴마크로 가서 왕위를 주장했다. 이제 그는 잉글랜드와 덴마크를 모두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하지만 두 왕국을 동시에 통치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크누트는 덴마크에 매제인 울프 야를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아들 하르타크누트를 그의 보호 아래 두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점차 문제를 일으켰다. 1026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스웨덴의 아눈드 야콥이 연합하여 덴마크를 공격했다. 울프 야를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어린 하르타크누트를 덴마크의 왕으로 선출하도록 덴마크 자유민들을 설득했다. 섭정으로서 울프는 덴마크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크누트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스칸디나비아로 건너간 그는 스웨덴의 헬게오에서 노르웨이-스웨덴 연합군과 맞붙었다. 전투의 결과는 애매했지만, 그는 결국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스칸디나비아 사료들은 크누트가 전투 후 곧 울프를 처형했다고 기록한다. 배신에 대한 또 다른 냉혹한 응징이었다.


1027년, 크누트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명목상으로는 신앙심 때문이었지만, 실제로는 외교적 목적이 더 컸다. 로마에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드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황제의 아들 하인리히 3세와 자신의 딸 군힐다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는 정치적 걸작이었다. 크누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두 군주와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는 또한 교황과 협상하여 잉글랜드 순례자들이 로마로 가는 길에 내야 하는 통행료를 낮추고, 주교들의 팔리움 값을 할인받았다. 이런 양보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잉글랜드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028년, 크누트는 마침내 노르웨이를 정복했다. 그는 50척의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각 지역의 집회를 소집했다. 그의 전략은 단순했지만 효과적이었다. 노르웨이 귀족들을 뇌물로 매수한 것이다. 올라프 하랄드손은 이미 귀족들의 아내들을 마술 혐의로 체포하여 인기를 잃은 상태였다. 크누트가 트론헤임에 도착했을 때, 아이라팅 회의는 그를 왕으로 선포했다. 몇 달 만에 올라프는 스웨덴으로 도망쳤다. 크누트는 이제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이자 스웨덴 일부의 지배자였다. 1027년 로마에서 보낸 서신에서 그는 자신을 "전체 잉글랜드와 덴마크와 노르웨이인들과 일부 스웨덴인들의 왕"이라고 칭했다.


중세 역사가 노먼 캔터는 크누트를 "앵글로색슨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왕"이라고 불렀다. 이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크누트의 북해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 제국은 개인적 결합에 기반했고, 그것이 곧 약점이 되었다. 크누트는 세 왕국을 동시에 통치할 수 없었고, 그의 부재는 각 지역에서 불만을 키웠다. 특히 노르웨이에서의 통치는 실패했다. 그는 노섬브리아의 엘프기푸와 그녀의 아들 스베인 크누트손을 노르웨이의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그들의 가혹한 세금 정책은 반란을 일으켰다.


1030년, 올라프 하랄드손이 스웨덴군을 이끌고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트론헤임 지역 주민들은 그를 원하지 않았고,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패배하여 죽었다. 올라프는 나중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그의 사후 명성은 크누트의 노르웨이 통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크누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았다.


크누트는 1035년 11월 12일 잉글랜드 도셋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제국은 즉시 붕괴되었다. 노르웨이는 올라프의 서자 마그누스가 되찾았다. 잉글랜드는 크누트의 아들 해럴드 헤어풋에게, 덴마크는 하르타크누트에게 나뉘었다. 1040년, 해럴드가 죽자 하르타크누트가 잉글랜드도 통치했지만, 1042년 그마저 2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북해 제국은 완전히 사라졌고, 잉글랜드는 다시 앵글로색슨 왕조로 돌아갔다. 에셀레드와 엠마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크누트는 단지 야심찬 정복자였을 뿐일까? 역사적 증거는 더 복잡한 그림을 그린다. 크누트의 통치는 잉글랜드에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에셀레드 치하에서 계속되던 바이킹 습격은 멈췄고, 경제는 회복되었다. 크누트는 앵글로색슨 법과 제도를 존중했고, 교회를 지원했으며, 문화적 교류를 장려했다. 그의 궁정은 영어와 고대 노르드어가 모두 사용되는 다언어 환경이었고, 그는 노르드 시인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크누트의 법전은 그의 통치 철학을 잘 보여준다. 1020년대에 제정된 그의 법은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실용주의적이었다. 이교 의식은 금지되었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교 추장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는 권력 기반이 확고해질 때까지 교회에 유리한 법을 만들지 않았다. 이런 유연성이 그의 성공의 비결이었다.


크누트가 정말로 파도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서야 처음 기록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완전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지만 이 전설이 천 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크누트의 본질적 특성, 즉 권력과 겸손의 역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례 없는 제국을 건설한 정복자였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크누트 대왕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가 만든 것과 그가 남기지 못한 것을 모두 봐야 한다. 그의 북해 제국은 그의 생애와 함께 끝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단순히 영토가 아니었다. 그는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 사이의 문화적 다리를 놓았고, 바이킹을 유럽 기독교 세계의 일부로 통합하는 과정을 완성했다. 그의 통치는 1066년 노르만 정복의 무대를 마련했다. 만약 크누트가 안정적인 왕조를 세웠다면, 월리엄 정복왕은 잉글랜드를 정복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크누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왕으로 애도했다. 그는 샤프츠베리에 묻혔다가 나중에 윈체스터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의 무덤은 잉글랜드 내전 기간에 파괴되었고, 그의 유골은 다른 앵글로색슨 왕들의 것과 섞였다. 20세기 연구자들이 이 유골을 분석했지만, 어떤 것이 크누트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한때 북해를 지배했던 왕의 유해조차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크누트의 진정한 유산은 뼈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가능성에 있다. 그는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가 하나의 통치 아래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1세기 전반, 유럽이 여전히 민족적, 종교적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을 때, 크누트는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이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왕국을 만들었다. 그의 통치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잔혹했고, 기회주의적이었으며, 때로는 배신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비전이 있었고, 그 비전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다.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크누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아마도 우리는 그를 그의 시대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 11세기 초는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왕위는 칼날 위에서 결정되었고, 충성은 변덕스러웠으며, 권력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었다. 이런 세계에서 크누트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힘으로 정복했지만, 지혜로 통치했다. 그는 바이킹의 아들이었지만, 기독교 유럽의 왕이 되었다. 그는 파도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해를 건너 제국을 만들었다.


크누트 대왕의 이야기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야망과 현실주의, 잔혹함과 지혜, 정복과 통치 사이의 균형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영원하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날 때, 그것이 전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도 있다. 크누트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었다. 비록 한 세대 동안만이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성취였다.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크누트를 다양한 렌즈로 보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를 침략자로 시작해서 정당한 왕으로 끝나는 여정으로 묘사한다. 스칸디나비아 사가는 그를 전설적인 영웅으로 미화한다. 교회 기록은 그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찬양한다. 이 모든 관점에는 진실의 조각이 있다. 크누트는 이 모든 것이었고, 그 이상이었다. 그는 바이킹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정복자이자 중세 유럽 정치의 선구자였다. 그는 파도를 멈출 수 없었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대함의 척도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81%AC%EB%88%84%ED%8A%B8%20%EB%8C%80%EC%9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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