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7년 어느 봄날, 한 젊은 노르만 기사가 남부 이탈리아 아풀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열두 명의 형제 중 여섯째였고, 고향 노르망디에서는 물려받을 땅도, 기대할 유산도 없었다. 그의 이복형 드로고는 이미 아풀리아 백작이 되어 있었지만, 늦게 도착한 이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척박하고 위험천만한 칼라브리아 지역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이 젊은 기사는 생존을 위해 산적처럼 살아야 했다.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몸값을 받아냈다. 그의 이름은 로베르 드 오트빌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 '기스카르(Guiscard)', 즉 '교활한 자', '영리한 자'라는 별명으로.
이 별명은 그의 운명을 예고했다. 40년도 채 되지 않아 로베르 기스카르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지배자가 되었고, 교황의 동맹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악몽이 되었으며, 그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앞까지 진격했다. 그가 죽을 무렵 그는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 살레르노의 군주, 시칠리아의 종주였다. 산적에서 공작으로, 무일푼에서 지중해의 강자로 변신한 이 놀라운 여정은 중세 유럽에서도 가장 극적인 성공 스토리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정복 전쟁은 지중해 세계의 권력 구도를 재편했고,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영향력이 지배하던 지역에 라틴 기독교 세계를 확장시켰으며, 십자군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를 이해하려면 먼저 11세기 남부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이 지역은 유럽 역사상 가장 복잡한 정치적 퍼즐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일부를 지배했고, 롬바르드족 군주들은 베네벤토, 살레르노, 카푸아 같은 공국을 다스렸으며, 나폴리는 독립적인 공작령이었다. 시칠리아는 이슬람 토후국들이 나눠 가진 상태였다. 이 모든 세력들은 끊임없이 서로 싸웠고, 그 싸움 속에서 용병이 필요했다. 바로 이 용병 수요가 노르만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노르만인들은 원래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이킹의 후손이었다. 10세기 초 이들은 프랑스 북부에 정착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고, 프랑스어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조상들의 호전성과 모험심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1015년경부터 노르만 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례자였다가 용병이 되었고, 용병에서 땅을 받은 귀족이 되었으며, 귀족에서 정복자로 변모했다. 1029년 아베르사의 라이눌프가 최초의 노르만 백작이 되었고, 1042년에는 로베르의 이복형 윌리엄이 아풀리아 백작이 되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1047년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중세 기준으로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그는 맨손으로 시작해야 했다. 칼라브리아에서의 초기 몇 년은 생존의 시간이었다. 그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비잔티움 영토를 습격했고, 지역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책략에 있었다. 그는 적을 기만하고, 협상을 통해 승리하고, 필요할 때는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오트란토 같은 도시에서는 말솜씨로 성문을 열게 만들었고, 다른 곳에서는 유명한 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1053년 치비타테 전투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명성을 확립한 첫 번째 대전투였다. 교황 레오 9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무법자처럼 행동하는 노르만인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비잔티움, 롬바르드, 그리고 독일 용병들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노르만인들은 로베르의 이복형 험프리의 지휘 아래 단결했다. 로베르는 좌익을 맡았다. 전투는 처음에 교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로베르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했다. 그는 자신의 예비군을 이끌고 돌격했고, 개인적으로도 놀라운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동시대 연대기는 그가 세 번이나 말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타 싸웠다고 기록한다. 노르만인들은 승리했고, 교황을 포로로 잡았다.
이 역설적인 승리는 노르만인들의 운명을 바꿨다. 교황을 이긴 것이 오히려 교황과의 동맹으로 이어진 것이다. 1057년 험프리가 죽자 로베르는 형의 아들들을 제치고 아풀리아 백작이 되었다. 모든 노르만 귀족들이 이를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반란이 일어났지만, 로베르는 그때마다 이를 진압했다. 그의 리더십은 군사적 능력뿐 아니라 정치적 통찰력에도 기반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었다. 이것은 실용주의였다. 미래의 정복을 위해서는 이 귀족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059년 멜피 조약은 로베르 기스카르 경력의 전환점이었다. 교황 니콜라스 2세는 신성로마제국과의 서임권 투쟁에서 동맹이 필요했고, 노르만인들은 정당성이 필요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조약에서 로베르는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 그리고 시칠리아의 미래 영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것은 단순한 명목상의 칭호가 아니었다. 교황의 인준은 로베르의 정복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제 그는 단순한 모험가나 용병 대장이 아니라 교회의 전사였고,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기독교의 확장을 의미했다.
시칠리아 정복은 로베르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1061년 그는 막내 동생 로제와 함께 메시나 해협을 건넜다. 시칠리아는 23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왔고, 여러 토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형제들의 협력은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메시나를 함락시킨 후 섬을 가로질러 진격했다. 하지만 곧 갈등이 시작되었다. 로제는 자신의 공헌에 비해 보상이 적다고 느꼈고, 로베르는 동생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했다. 1062년 두 형제는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로제는 칼라브리아의 형의 영토를 약탈했고, 로베르는 보복했다. 그 결과 발생한 기근은 대규모 민중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형제들은 서둘러 화해했다. 그들은 앞으로의 모든 정복물을 균등하게 나누기로 합의했다.
1071년은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4월에는 4년간의 포위 끝에 바리가 함락되었다. 이것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바리의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수백 년간 유지되던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지배는 끝났고, 그 자리를 노르만인들이 차지했다. 같은 해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가 함락되었다. 이 도시는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도시 중 하나였다. 팔레르모의 함락은 시칠리아 정복의 결정적 순간이었고, 비록 섬의 완전한 정복은 1091년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미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로베르의 정복은 단순히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복한 땅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칼라브리아의 산타 에우페미아에 노르만 수도원을 세웠고, 살레르노 대성당의 기초를 놓았다. 이것은 종교적 개종의 도구였다. 그리스 정교를 따르던 지역에 라틴 기독교를 이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베르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지역의 그리스인, 롬바르드인, 심지어 무슬림들과도 협력했다. 그의 행정은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융합시켰고, 이것이 나중에 시칠리아 왕국의 독특한 다문화적 성격의 기반이 되었다.
1076년 로베르는 롬바르드 살레르노 공국을 정복했다. 그는 이미 살레르노의 공주 시켈가이타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이는 정치적 계산의 일환이었다. 시켈가이타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전쟁터의 동반자였다. 그녀는 남편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고, 위기의 순간에 군대를 집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살레르노를 손에 넣음으로써 로베르는 캄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의 영토는 남부 이탈리아 전체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로베르 기스카르의 가장 대담한 모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1081년 그는 비잔티움 제국 자체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명분은 있었다. 전 황제 미카엘 7세는 자신의 아들과 로베르의 딸을 약혼시켰는데, 미카엘이 폐위되자 로베르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간주했다. 또한 미카엘로 사칭하는 가짜 황제가 나타나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진실은 로베르가 지중해의 진정한 강자인 비잔티움에 도전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1081년 5월 로베르는 150척의 함대와 약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해를 건넜다. 그의 목표는 두라초(현재의 알바니아 두러스)였는데, 이는 발칸반도에서 비잔티움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군대에는 1,300명의 노르만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무서운 전사들이었다. 하지만 바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베네치아 함대가 비잔티움 편에 개입해 로베르의 함대를 격파한 것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노르만인들이 오트란토 해협을 장악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리스 화염병을 사용해 노르만 함선들을 불태웠다.
하지만 로베르는 해전 패배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육로로 두라초를 포위했다. 도시는 좁고 긴 반도에 위치해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비잔티움의 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왔다. 알렉시오스는 재능 있는 장군이었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재앙적 패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약화되었고, 그는 가용한 모든 병력을 모아야 했다. 그의 군대는 비잔티움 정규군, 바랑기아 근위대(주로 영국에서 온 앵글로색슨인들), 투르크 용병, 프랑크 용병, 셀주크 투르크가 보낸 7,000명의 보조군 등으로 구성되었다. 총 병력은 노르만군과 비슷하거나 약간 많았다.
1081년 10월 18일, 두라초 외곽에서 두 군대가 충돌했다. 이것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두 세계의 충돌이었다. 한쪽은 중세 유럽의 새로운 군사 엘리트인 노르만 기사들이었고, 다른 쪽은 천년의 군사 전통을 가진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알렉시오스는 신중하게 군대를 배치했다. 바랑기아 근위대를 중앙에, 그의 최정예 부대인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타그마타를 그 옆에, 그리고 측면에 경기병을 배치했다.
전투는 비잔티움군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로베르의 우익이 공격을 받아 무너졌고, 비잔티움의 좌익이 이들을 추격했다. 하지만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바랑기아 근위대는 노르만 기사들의 돌격을 격퇴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주력에서 분리되었다. 그들은 거대한 전투 도끼로 노르만 기사들을 공격했고, 기사들의 말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하지만 바랑기아는 너무 깊숙이 진격했고 지쳤다.
로베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창병과 궁수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대를 바랑기아의 측면으로 보냈다. 지치고 고립된 바랑기아는 저항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소수는 대천사 미카엘 교회로 도망쳤다. 노르만인들은 교회를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바랑기아 근위대 전원이 화염 속에서 죽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패배였다. 바랑기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두려움을 받던 전사들이었는데, 그들이 전멸한 것이다.
바랑기아의 파괴 이후 전투는 빠르게 노르만의 승리로 기울었다. 로베르는 자신의 중기병을 이끌고 비잔티움 중앙으로 돌격했다. 한 동시대 기록은 그를 "날개 달린 기사"처럼 적진을 가르며 돌진했다고 묘사한다. 바랑기아의 파멸을 목격한 비잔티움군의 사기는 무너졌다. 알렉시오스 자신도 이마에 창 상처를 입고 간신히 전장에서 탈출했다. 비잔티움군은 패주했고, 약 5,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두라초 전투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최고 군사적 승리였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를 위협하는 위치를 확보했다. 1082년 2월 두라초는 함락되었고, 로베르는 코르푸와 케팔로니아도 점령했다.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다시 한번 개입했다.
1083년 로베르는 이탈리아로 급히 돌아가야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로베르는 교황과의 동맹을 중요하게 여겼고, 아들 보에몬드에게 그리스 원정을 맡긴 채 3만 6천의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하인리히는 노르만군과 싸우고 싶지 않아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로베르는 교황을 구출했지만, 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면서 3일간의 파괴가 벌어졌다. 이것은 로베르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리스에서는 보에몬드가 처음에는 성공을 거뒀지만, 알렉시오스는 재능 있는 전략가였다. 그는 소모전으로 노르만군을 약화시켰고, 1083년 라리사 전투에서 보에몬드를 격파했다. 노르만인들은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다. 1084년 로베르는 그리스로 돌아와 캠페인을 재개했다. 그는 코르푸와 케팔로니아를 재점령했고, 다시 한번 비잔티움 영토 깊숙이 진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운명은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더 이상의 정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1085년 7월 17일, 케팔로니아 섬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동시대 기준으로는 긴 삶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베노사의 산타 트리니타 수도원에 묻혔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죽음으로 발칸반도 정복의 꿈은 사라졌다. 그의 후계자인 아들 로제 보르사는 아버지만큼의 능력이나 야망이 없었다. 보에몬드는 장자였지만 서출이라는 이유로 상속에서 배제되었고, 나중에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해 안티오키아의 군주가 되었다. 알렉시오스는 노르만의 위협에서 벗어나 제국을 재건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고, 이것이 콤네노스 왕조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유산은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공성전, 야전, 해전 모두에서 능력을 보여주었다. 치비타테에서 교황군을 격파했고, 바리를 4년간 포위 끝에 함락시켰으며, 두라초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했다. 그의 전술적 천재성은 상황을 읽고 적의 약점을 공략하는 능력에 있었다. 두라초 전투에서 바랑기아 근위대를 고립시켜 파괴한 것은 그의 전투 감각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다.
정치적으로 로베르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그는 교황과의 관계를 능숙하게 관리해 자신의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물론 이 관계는 항상 순탄하지 않았다. 교황들은 로베르의 증가하는 권력을 두려워했지만, 비잔티움이나 신성로마제국보다는 가톨릭 노르만 공작을 선호했다. 로베르는 또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다루는 데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이것은 실용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미래의 정복을 위해 이들의 지원이 필요했고, 완전한 파괴보다는 통합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문화적으로 로베르의 정복은 지중해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는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이 지배하던 지역에 라틴 기독교를 이식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단순한 문화적 제국주의가 아니었다. 그가 만든 노르만 시칠리아는 라틴, 그리스, 아랍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혼종 사회였다. 팔레르모는 세 언어가 사용되고, 세 종교가 공존하며, 세 건축 양식이 어우러지는 도시가 되었다. 이 문화적 다원주의는 12세기 시칠리아 왕국의 번영의 기반이 되었다.
전략적으로 로베르 기스카르의 정복은 유럽사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성공은 서유럽의 팽창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수세기 동안 이슬람과 비잔티움이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이제 균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로베르의 아들 보에몬드가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동방으로 향했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해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로베르의 조카인 로제 2세는 1130년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은 200년 동안 지중해의 주요 강국으로 남았다.
하지만 로베르 기스카르를 영웅화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무자비한 정복자였고, 그의 초기 경력은 산적과 다름없었다. 그는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필요할 때는 배신도 했다. 그의 별명 '기스카르'는 칭찬이 아니라 그의 교활함에 대한 인식이었다. 로마의 약탈은 그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3일간 계속된 파괴로 로마 시민들은 노르만인들을 야만인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의 통치 아래 그리스 정교도들은 강제로 개종당했고, 저항하는 도시들은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047년 칼라브리아의 산속에서 산적처럼 살던 무일푼의 기사가 어떻게 지중해의 강자가 되었는가? 대답은 복합적이다. 군사적 천재성, 정치적 수완, 무자비한 야망, 그리고 운이 결합되어야 했다. 로베르는 11세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했고, 그 혼란 속에서 기회를 찾아냈다. 그는 비잔티움과 교황, 롬바르드와 노르만,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틈새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로베르의 성공은 또한 노르만 군사 시스템의 우월함을 보여준다. 노르만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전투 훈련된 말을 타고 긴 창을 들고 돌격하는, 중세 유럽의 가장 진화된 형태의 전사였다. 그들의 돌격은 거의 막을 수 없었고, 두라초 전투는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노르만의 성공은 단순히 기술적 우위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적응력이 뛰어났다. 비잔티움에서 배운 공성전 기술, 이슬람에서 가져온 행정 시스템, 지역의 롬바르드와 그리스 전통을 통합했다. 이러한 문화적 유연성이 그들을 단순한 정복자에서 효과적인 통치자로 만들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를 평가할 때 우리는 그를 그의 시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1세기는 폭력적인 시대였다. 전쟁은 귀족들의 일상이었고, 정복은 정당한 야망으로 여겨졌다. 로베르의 잔인함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과했을 수 있지만, 완전히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독특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잔인함이 아니라 그의 비전이었다. 그는 단순히 땅을 정복하는 것을 넘어서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가 세운 제도들, 그가 만든 동맹들, 그가 건설한 수도원과 성당들은 모두 영속적인 지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로베르 기스카르를 다양하게 평가해왔다. 동시대의 비잔티움 역사가 안나 콤네나는 그를 "가장 악랄한 적"으로 불렀지만 동시에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라틴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기독교 세계의 챔피언으로 묘사했다. 근대 역사가들은 그를 기회주의자로 보거나 뛰어난 국가 건설자로 보거나 했다. 진실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의 조합일 것이다. 로베르는 복잡한 인물이었고, 그의 동기는 야망, 종교적 열정, 정치적 계산, 그리고 순수한 모험심이 뒤섞인 것이었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정복 전쟁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아마도 노르만 시칠리아 왕국일 것이다. 이 왕국은 12세기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로제 2세의 통치 아래 팔레르모는 코르도바와 콘스탄티노플에 필적하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랍 학자들과 그리스 학자들, 라틴 성직자들이 함께 일하며 지식을 교환했다. 건축은 비잔티움의 황금 모자이크, 아랍의 기하학적 문양, 노르만의 견고한 구조를 결합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닦아놓은 기반 때문이었다.
정복자로서의 로베르 기스카르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고대의 영웅들과 비교될 수 있다. 그들처럼 그도 무에서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처럼 그도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고 대담한 전략가였다. 그러나 로베르의 성취는 어떤 면에서 더 놀랍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왕국을 물려받았고,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의 자원을 사용했다. 로베르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그가 가진 것은 그의 검과 그의 지능뿐이었다. 40년 후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였고 비잔티움 제국의 악몽이었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야기는 또한 중세 유럽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중세를 정체된 시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1세기는 실제로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다. 인구가 증가했고, 새로운 땅이 개간되었으며, 도시들이 성장했고, 무역이 확대되었다. 이 팽창하는 에너지는 출구를 필요로 했고, 그것은 정복의 형태로 나타났다.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 1066년 노르망디의 영국 정복, 그리고 곧 이어질 십자군은 모두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었다. 서유럽은 더 이상 방어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공격적으로 팽창하고 있었고,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 팽창의 선봉에 있었다.
1085년 케팔로니아에서 로베르가 죽었을 때 그의 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지 못했고, 비잔티움 제국을 무릎 꿇리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실패였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의 성취는 충분히 놀라웠다. 한 세대 만에 그는 지중해의 권력 지도를 다시 그렸다. 비잔티움은 이탈리아에서 영원히 축출되었고, 이슬람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며, 교황권은 새로운 동맹을 얻었다. 유럽의 무게 중심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대의 중심지에서 새로운 권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로베르 기스카르라는 이름은 오늘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조카인 정복왕 윌리엄이나 그의 아들 보에몬드가 더 유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세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로베르 기스카르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안다. 그는 단순히 개인적 영광을 추구한 모험가가 아니었다. 그는 역사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의 검은 왕국을 세웠고, 그의 외교는 동맹을 만들었으며, 그의 비전은 문명들을 융합시켰다.
산적에서 공작으로, 무명에서 전설로, 무에서 제국으로. 로베르 기스카르의 삶은 중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극적인 예다. 그 시대는 운명이 정해진 시대가 아니라 대담한 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만들 수 있는 시대였다. 교활함과 용기, 계산과 대담함, 야망과 능력이 결합되었을 때 무엇이 가능한지를 로베르 기스카르는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1047년 칼라브리아의 산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던 무일푼의 기사가 1085년 비잔티움 제국과 맞서 싸우다 죽었다. 그 사이의 여정이 바로 역사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A1%9C%EB%B2%A0%EB%A5%B4%20%EA%B8%B0%EC%8A%A4%EC%B9%B4%EB%A5%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