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로 로마노비치-루스 최후의 왕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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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년, 루리크 왕조의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다닐로 로마노비치였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는 자신의 기념비적 저작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Istoriia Ukraïny-Rusy, 1898-1937) 제3권에서 다닐로의 시대를 갈리치아-볼히니아 국가 형성의 핵심 시기로 다루었다. 흐루셰브스키는 다닐로를 단순히 중세의 한 군주가 아니라,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국가성의 계승자로 평가했다. 이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공식 역사관, 즉 키예프 루스의 정통 후계자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다닐로의 삶은 곧 동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대의 축소판이 될 운명이었다. 그는 네 살의 나이에 망명자가 되었고, 긴 투쟁 끝에 왕국을 되찾았으며, 몽골의 침입을 견뎌냈고, 마침내 루스 최초이자 최후의 왕관을 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한 문명이 몰락하는 순간에도 존엄을 잃지 않으려 했던 한 남자의 처절한 생존기이자, 동과 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정치가의 비극이었다.


1205년, 다닐로의 아버지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폴란드군과의 자비치(Zawichost)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만은 1199년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통합하여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가장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인물이었다. 그는 1200년 키예프 대공 루리크 로스티슬라비치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키예프를 점령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Galician-Volhynian Chronicle)는 로만을 "온 루스 땅을 정복한 황제"라고 묘사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군주의 사망이 아니라, 통합된 루스 국가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13세기 후반에 작성된 고대 루테니아 문학의 주요 작품으로, 1201년부터 1292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이 연대기는 히파티우스 필사본(Hypatian Codex)의 형태로 전해졌으며, 1425년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 니콜라이 카람진(Nikolay Karamzin)이 코스트로마의 히파티우스 수도원에서 이 필사본을 발견했다. 흐루셰브스키는 1900년대 초 이 연대기의 연대기 체계를 최초로 정립했으며, 이전 필사자가 잘못 삽입한 연대를 바로잡았다. 조지 페르펙키(George Perfecky) 교수는 1973년 하버드 대학 우크라이나 연구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연대기의 첫 영문 번역본을 출판했다.


이 연대기는 다닐로의 생애를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1201년부터 1260년까지의 갈리치아 부분은 다닐로의 통치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 때로는 "다닐로 연대기"(Chronicle of Daniil)라고도 불린다. 최근 연구자들, 특히 미콜라 코틀랴르(Mykola Kotlyar, 1993)와 페트로 톨로치코(Petro Tolochko, 2003)는 이 연대기가 실제로는 6명의 다른 저자들이 쓴 갈리치아 부분과 5명의 저자가 쓴 볼히니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모두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보비치, 다닐로 로마노비치, 바실코 로마노비치, 블라디미르 바실코비치의 궁정과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갈리치아의 보야르 귀족들은 로만의 죽음 직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강력한 군주보다는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약한 통치자를 원했다. 폴란드 역사학자 다리우시 돔브로프스키(Dariusz Dąbrowski)는 자신의 저작 『다닐 로마노비치: 루스의 왕』(Daniel Romanowicz Król Rusi, 2012)에서 이 시기 보야르들의 분열주의적 성향을 상세히 분석했다. 네 살배기 다닐로와 그의 어머니 비잔티움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친척인 안나(Anna of Byzantium), 그리고 동생 바실코는 고귀한 혈통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궁정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 망명의 시절이 다닐로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이 탐욕스러운 보야르들, 폴란드와 헝가리의 왕들, 그리고 수많은 루스 공작들에 의해 찢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210년, 겨우 아홉 살이었던 그는 헝가리군의 도움으로 잠시 갈리치아를 되찾았다. 하지만 1213년, 강력한 보야르 볼로디슬라프 코르밀치치가 주도한 반란으로 다시 쫓겨났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다닐로와 바실코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침공했지만, 실제로는 갈리치아를 둘로 나누어 차지했다.


헝가리 역사학자 머르톤 폰트(Márton Font)는 안드라시 2세와 벨러 4세의 갈리치아 정책을 분석하면서, 이들이 다닐로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영토 확장을 노렸음을 밝혔다. 이러한 굴욕이 다닐로에게 가르쳐준 것은 명확했다. 귀족들을 믿을 수 없고, 외국 군주들의 도움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며, 권력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1219년, 다닐로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장인인 대담한 므스티슬라프(Mstislav the Bold)에게 갈리치아에 대한 권리를 양도했다. 이는 전술적 후퇴였다. 1221년부터 다닐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왕국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볼히니아를 통합했다. 7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 끝이었다. 그러나 갈리치아는 더 어려운 과제였다.


1223년, 다닐로는 생애 첫 번째 몽골과의 조우를 경험했다. 칼카 강 전투에서 그는 루스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이 전투는 대재앙이었다. 몽골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루스와 쿠만(Cuman) 연합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이 전투에서 "물이 사람들의 무리로 뒤덮였다"고 기록했다. 다닐로는 부상을 입었지만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몽골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루스의 전통적인 전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각인시켰다. 하지만 몽골군은 이번에는 물러갔고, 루스의 군주들은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230년대 동안 다닐로는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경쟁 관계에 있던 루스 공작들과 복잡한 정치적 게임을 벌였다. 1238년, 마침내 다닐로는 갈리치아의 수도 할리치를 장악했다. 그에게는 33년이 걸린 귀환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네 살이었고, 이제 서른일곱 살의 노련한 전사이자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닐로를 "동중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다닐로는 도시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보야르들과 달리 상인과 장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자를 원했다. 다닐로는 즉시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재통합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고, 독일인, 폴란드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정착민들을 초대하여 무역을 활성화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그의 아들 레프의 이름을 딴 리비우(르보프, Lviv)였다. 이 도시는 후에 왕실 소재지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우크라이나의 주요 문화 중심지로 남아 있다. 다닐로는 또한 켈름(Kholm, 현재의 폴란드 헤움)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1239년 다닐로는 키예프를 장악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키예프는 이미 예전의 영광을 잃었지만, 여전히 루스의 정신적 수도였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다닐로는 키예프의 "마지막 통치자"였으며, 따라서 갈리치아-볼히니아의 통치자들만이 키예프 왕좌의 정통 후계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총독 드미트로(Voivode Dmytro)를 남겨두고 갈리치아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몽골이 다시 오고 있다는 것을.


1240년 11월 28일,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키예프를 포위했다. 다닐로는 그때 헝가리에 있었다. 그는 서방 기독교 세계로부터 군사 동맹을 얻어내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키예프의 드미트로 총독은 영웅적으로 저항했다. 몽골군은 공성 무기를 동원했고, 12월 6일 마침내 성벽을 무너뜨렸다. 거리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긴 포위 끝에 성벽이 무너졌고, 도시 안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했다.


6년 후 이 폐허를 지나간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i)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 땅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해골과 뼈를 보았다. 키예프는 매우 크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나, 이제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현재 200채도 안 되는 집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가장 가혹한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


키예프의 함락은 키예프 루스의 공식적인 종말을 의미했다. 몽골군은 계속 서진하여 1240-1241년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침공했다. 다닐로의 왕국은 파괴되었다. 할리치(Halych)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다닐로는 도망치지 않았다. 1241년 다닐로가 켈름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재건에 착수했다.


1245년 8월 17일, 다닐로는 야로슬라블(Yaroslav)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체르니히우 공작,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 그리고 헝가리와 폴란드 군대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헝가리 문서는 이 전투에서 다닐로를 "Rex Ruthenorum", 즉 "루스의 왕"이라고 언급한다. 이는 공식적인 대관식 이전이었지만, 이미 이웃 국가들이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승리로 다닐로는 마침내 아버지의 영토를 완전히 되찾았다. 그는 동생 바실코를 볼히니아의 통치자로 삼았지만, 두 지역 모두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246년, 다닐로는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 했다. 바투 칸의 사라이로 가서 복종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오레스트 수브텔니(Orest Subtelny)는 자신의 저작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이 장면을 생생하게 전한다. 바투 칸은 다닐로에게 발효된 말젖(쿠미스)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것이다. 너는 이제 우리 중 하나니까."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이 굴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 타타르의 명예에 대한 불명예여! 그의 아버지는 루스 땅의 황제였고, 폴로베츠 땅을 정복했으며, 다른 모든 이웃 국가들과 싸웠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명예를 받지 못한다면,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구절은 더 직접적이다. "다닐로는 이제 무릎을 꿇고 노예라 불린다. 이것이 가장 큰 치욕이다."


하지만 폴 마고치(Paul Magocsi) 같은 학자들은 다닐로의 복종이 단순한 굴복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조지 베르나드스키(George Vernadsky, 1970)는 다닐로의 몽골과의 동맹이 순전히 전술적이었으며, 그가 장기적으로는 몽골에 대한 저항 전략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마고치(2010)는 다닐로가 몽골의 조공을 징수하고 몽골의 행정 통제 확립에 협력함으로써 "팍스 몽골리카"의 이점을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표면적으로 다닐로는 충실한 신하였다. 그는 조공을 바쳤고, 요청받으면 몽골군에 병력을 제공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그가 "몽골 방식에 따라 군대를 재편하고 몽골 무기로 무장시켰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구축했다.


그의 전략은 교묘했다. 그는 폴란드, 헝가리,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자녀들을 이들 왕국의 왕족과 혼인시켰다. 그의 아들 로만(Roman Danylovich)은 오스트리아 공국의 바벤베르크 가문 상속녀 게르트루트(Gertrude of Babenberg)와 1252년 결혼했다. 다닐로는 로만을 오스트리아 공작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실패했다. 또 다른 아들 슈반(Shvarno, Svarn)은 리투아니아 최초의 왕 민다우가스(Mindaugas)의 딸과 결혼하여 1264년부터 1267년(혹은 1269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딸 페레야슬라바(Pereyaslava)는 마조비아의 지에모비트 1세(Siemowit I of Masovia)와 결혼했고, 또 다른 딸 우스티니아(Ustynia)는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안드레이 2세(Andrey II of Vladimir-Suzdal)와 결혼했다.


가장 대담한 시도는 교황청과의 협상이었다. 1245년 다닐로는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를 만났다. 그는 교황에게 제안했다. 만약 교황이 몽골에 대항한 십자군을 조직해준다면, 자신은 갈리치아-볼히니아를 로마 교회의 권위 아래 두겠다고. 이것은 엄청난 제안이었다. 정교회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가톨릭으로 전향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교황은 이 전망에 흥분했다. 그는 다닐로의 저항을 격려했고, 1253년 드로히친(Dorohychyn)에서 교황 특사 오피조 피에스키(Opizo Fieschi)를 통해 다닐로에게 왕관을 씌웠다. 얀 드우고시(Jan Długosz)의 연대기는 1460년대와 1480년 사이에 작성되었지만, 다닐로의 대관식에 대해 가장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드우고시는 이렇게 기록했다. "다닐로, 키예프와 드로히친의 루테니아인들의 공작이자 군주, 그 시대 부, 영토, 민족, 행동력, 근면함에서 뛰어나고 루테니아 군주들 중 가장 유명했던 그가 왕권의 명성과 위상의 탁월함을 얻기 위해 오피조 수도원장을 맞이했다."


2024년 학술지 『코드룰 코스민울루이』(Codrul Cosminului)에 게재된 논문은 다닐로의 대관식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교황청의 선전이 아니라 실제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밝혔다. 야로슬라프 자틸류크(Yaroslav Zatylyuk) 같은 연구자들은 드우고시의 기록이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당시 헝가리와 폴란드 문서들에서도 다닐로를 "루스의 왕"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 대관식은 승리보다는 실망에 가까웠다. 다닐로는 나중에 쓰라리게 말했다. "왕관을 원하지 않았지만, 타타르에 대항할 도움을 바라며 받아들였다." 연대기의 또 다른 버전은 더 직접적이다. "나는 왕관을 받았을 때 군대를 기대했다." 교황청의 약속은 공허했다. 십자군은 오지 않았다. 유럽은 이미 다섯 개의 십자군 전쟁에 자원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서유럽은 몽골의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몽골은 먼 동방의 이야기였다.


다닐로는 혼자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254년 그는 몽골 장군 쿠렘사(Kuremsa)가 이끄는 습격을 격퇴했다. 그는 심지어 키예프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1256년 다닐로는 자신의 캠페인을 시작하여 볼히니아에서 몽골을 몰아냈다. 그는 1257년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와 동맹을 맺고 몽골에 대항했다.


그러나 1259년, 몽골의 거대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부룬다이(Burundai)와 노가이 칸(Nogai Khan)이 이끄는 대군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것은 단순한 습격이 아니라 징벌 원정이었다. 다닐로가 몽골에 저항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룬다이는 다닐로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모든 요새의 성벽을 허물거나, 아니면 전멸당하거나.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부룬다이가 말했다. '다닐로가 내게 평화를 원한다면, 그의 도시들을 파괴하라.' 다닐로는 이 말을 듣고 괴로워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다닐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건설한 방어 시설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했다.


연대기는 계속된다. "그들은 켈름으로 가서 도시를 파괴했다. 그리고 슈툼(Shtum)으로 가서 그것도 파괴했다. 그리고 다닐로는 볼로디미르(Vladimir-Volynsky)의 성벽을 허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했다." 켈름, 리비우, 블라디미르-볼린스키, 루체스크, 크레멘, 하이워론 등 그가 건설하고 강화한 도시들의 성벽이 무너졌다. 이것은 군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그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실패했다는 인정이었다.


그러나 다닐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타협의 예술을 배웠다. 겉으로는 몽골의 신하로 행동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루스의 전통과 자치를 보존했다. 그는 정교회를 유지했다. 교황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국은 종교적으로 로마로부터 독립적이었다. 갈리치아-볼히니아는 비잔티움으로부터 별도의 교구를 얻었는데, 이는 블라디미르-수즈달의 경쟁자들이 키예프 교회를 장악하려 한 것과는 다른 전략이었다.


다닐로는 루스의 법과 관습을 지켰다. 그는 도시를 재건하고 무역을 장려했다. 몽골의 지배 아래서도 갈리치아-볼히니아는 번영했다. 흑해와 폴란드, 독일, 발트해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 덕분에 상업이 발전했다. 할리치, 볼로디미르, 리비우, 켈름, 페레미실(Peremyshl), 드로히친, 테레보블랴(Terebovlya) 같은 주요 도시들이 중요한 경제·문화 중심지로 기능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은 다닐로의 통치 아래 "황금기"를 경험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문학이 번창하여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가 탄생했다. 이 연대기는 『이고르 원정기』(Slovo o polku Ihorevi)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서사 스타일로 유명하다. 인구 성장은 서쪽과 남쪽에서 온 이민자들, 특히 독일인과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촉진되었다. 건축도 발전했다. 12세기까지 갈리치아-볼히니아(그리고 스몰렌스크와 수즈달리아)의 신흥 도시 중심지들에서는 키예프, 체르니히우, 페레야슬라블 같은 기존 권력 중심지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새 건물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다닐로의 전략은 균형이었다. 그는 동과 서 사이에서, 복종과 저항 사이에서, 생존과 명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그는 몽골에게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서방과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왕관을 받았지만 정교회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성벽을 허물었지만 왕국의 경제적·문화적 기반을 강화했다.


1264년 다닐로가 켈름에서 죽었을 때, 그는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군사적으로 그는 몽골에게 패배했다. 그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파멸을 막았다. 그의 왕국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몽골의 종주권 아래 있었지만, 여전히 기능하는 국가였다.


그의 아들 레프 다닐로비치(Lev Danylovych, 약 1228-1301년)가 통치를 이어받았다. 레프는 1245년부터 1264년까지 벨즈의 공작, 1264년부터 1269년까지 페레미실의 공작, 1269년부터 1301년까지 할리치의 공작을 지냈다. 그는 1257년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딸 콘스탄스(Constance)와 결혼했다. 레프는 수도를 할리치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 건설된 리비우로 옮겼다. 이 도시는 이후 수세기 동안 우크라이나 서부의 가장 중요한 문화·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은 다닐로의 사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더 존속했다. 그의 손자 유리 1세(Yuri I)는 "루스의 왕"이라는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유리의 인장에는 라틴어로 "domini georgi regis rusie" (주 게오르기우스 루시아의 왕)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는 갈리치아-볼히니아가 여전히 "온 루스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왕국은 점차 약화되었다. 1340년대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Casimir III the Great)가 갈리치아를 정복했고, 리투아니아가 볼히니아를 차지했다. 1349년까지 독립적인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루스의 마지막 독립 왕국이 종말을 맞은 순간이었다.


다닐로의 삶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가 직면했던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흐루셰브스키는 1904년 그의 획기적인 논문 「"러시아" 역사의 전통적 도식과 동슬라브 역사의 합리적 정리 문제」에서 다닐로의 시대를 우크라이나 역사의 중심 시기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공식 역사관, 즉 키예프 루스-블라디미르-수즈달-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역사 서술을 거부했다.


대신 흐루셰브스키는 키예프 루스가 붕괴한 후 우크라이나 역사의 중심이 남서쪽, 즉 갈리치아-볼히니아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이 지역이 키예프 루스의 정치·경제 구조, 문화, 법을 계승했으며, 따라서 우크라이나 국가성의 정통 후계자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당시 러시아 제국 역사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하일 포고딘(Mikhail Pogodin) 같은 러시아 역사가들은 흐루셰브스키의 도식을 "범슬라브 민족"의 유기적 연속성을 파괴하는 이념적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흐루셰브스키의 접근법은 우크라이나 역사학에서 기본 틀로 자리 잡았다. 소련 시대에도 1929년까지는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이 이 도식을 받아들였다. 195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재통합 300주년에 대한 테제」가 새로운 규범적 틀로 공식화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새로운 도식은 하나의 루스 민족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이 발전했다는 개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따라서 통일된 러시아 국가를 전제로 하여 헤트만 국가의 존재를 부정했다.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다닐로 로마노비치의 이미지는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2011년 우크라이나 의회는 다닐로 탄생 810주년을 공식적으로 기념했다. 2012년 리비우의 주요 공항은 "다닐로 할리츠키 국제공항"으로 명명되었다. 우크라이나에는 "다닐로 할리츠키 훈장"이 있다. 2018년 학술지 『에미나크』(Eminak)에 게재된 논문은 독립 우크라이나 시기 동안 다닐로의 이미지가 어떻게 문화적 기억에 자리 잡았는지 분석했다. 기념비, 거리 이름, 우표, 화폐, 문장 등 다양한 형태로 다닐로는 기념되고 있다.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는 여러 군사 부대에 중세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붙였다. 2015년에는 제24기계화여단에 "다닐로 할리츠키 왕"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2024년 학술지 『키리』(Kirj)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명명은 갈리치아-볼히니아 국가가 교황청을 포함한 중세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은 강력한 국가였음을 강조하고, 다닐로가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맞서 싸운 역할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닐로의 이야기는 결국 비극이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몽골 제국은 너무 강력했고, 서방의 도움은 오지 않았으며, 루스의 분열은 너무 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닐로는 의미 있는 것을 성취했다.


우선, 그는 갈리치아-볼히니아를 13세기 동중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다닐로를 "용감한 전사이자 현명한 정치가"로 묘사하며, "그의 군주로서의 자질은 솔로몬 다음"이라고 칭송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다닐로는 실제로 그 시대 동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통치자 중 하나였다.

둘째, 그는 루스의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보존했다. 교황청과 협상하면서도 정교회를 유지했고, 몽골에 복종하면서도 루스의 법과 관습을 지켰다. 이러한 균형 잡기는 그의 후계자들이 계속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했다.

셋째,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무역을 장려하여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가 건설한 리비우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우크라이나 문화의 중심지로 남았다. 이 도시는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련, 그리고 독립 우크라이나를 거치면서도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보루로 기능했다.

넷째, 그는 외교와 왕조 혼인을 통해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유럽 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만들었다. 그의 자녀들은 헝가리, 오스트리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마조비아,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왕족과 혼인했다. 이는 갈리치아-볼히니아가 단순히 변방의 공국이 아니라 유럽 왕실 네트워크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그는 "루스의 왕"이라는 칭호를 확립했다. 비록 이 왕관이 실질적인 권력을 주지 못했고, 그가 몽골 칸의 신하였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컸다. 이는 루스가 여전히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의 후손들도 이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폴란드 역사학자 아드리안 유수포비치(Adrian Jusupović)는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대한 2019년 연구에서 이 연대기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로마노비치 왕조의 정치 프로그램을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연대기는 갈리치아-볼히니아가 키예프 유산의 정통 후계자임을 강조하면서, 블라디미르-수즈달 같은 경쟁 국가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다닐로의 왕관은 그의 손자 유리 1세와 함께 1308년 역사에서 사라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왕관과 권력의 상징들은 14세기 중반 폴란드가 리비우를 점령한 후 카지미에시 대왕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다닐로가 남긴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왕관이 아니었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학자들은 흐루셰브스키의 역사학적 업적을 평가하면서, 그가 다닐로의 시대를 우크라이나 역사의 핵심으로 자리매김시킨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이 각자 독자적인 정체성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별도의 역사적 서술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주장이었다.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서쪽에 확고히 고정시켰다. 그는 키예프 루스가 독특한 정치·행정 구조, 사회경제적 기반, 문화, 법을 가진 동슬라브 남부 부족들의 창조물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키예프 루스의 해체 이후, 흐루셰브스키는 남서쪽을 주목하여 새로운 정치적 중심을 확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1199-1253)과 거기서 탄생한 루테니아 왕국(1253-1349)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역사학적 틀 안에서 다닐로 로마노비치는 단순히 중세의 한 군주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가성의 계승자이자 수호자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는 몽골이라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고, 서방과 동방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으며,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할 때도 의미 있는 저항을 계속했다.


다닐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권력의 한계와 현실주의의 필요성을 가르쳐준다. 때로는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하다. 때로는 생존 자체가 승리다. 때로는 타협이 배신이 아니라 지혜다. 다닐로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루스를 몽골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냉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지키려 노력했다.


1240년 12월 6일 키예프가 함락되던 날, 중세 루스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다닐로 로마노비치는 그 여운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게 만들었다. 그는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에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는 영웅적으로 싸웠고, 현명하게 협상했고, 현실적으로 타협했으며, 가능한 것을 지켜냈다.


역사는 종종 승자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닐로 로마노비치의 이야기는 패배자도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몽골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루스를 통일하지 못했다. 그는 왕국을 영속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완전한 파멸이 예정된 순간에도 희망의 불씨를 지켰으며, 후대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유산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다닐로 로마노비치, 루스의 마지막 왕이자,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가장 위대한 생존자의 진정한 왕관이다. 그의 삶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법,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정체성을 지키는 법, 그리고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할 때도 의미 있는 저항을 계속하는 법에 대한 교훈이었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다닐로가 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B%8B%90%EB%A1%9C_%EB%A1%9C%EB%A7%88%EB%85%B8%EB%B9%84%EC%B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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