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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9

by gir

지하철역 안은 이른 봄의 냄새로 가득했다.
자판기 커피 향과 어른들의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주희의 발소리가 오래된 벽면에 또박또박 울렸다.
조금 전까지 주주의 젖은 코가 닿던 손끝이 아직 따뜻했다.

‘주주, 나 금방 올게.’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이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순간
주희의 눈에 약간의 아쉬움이 번졌다.
지하철이 들어오며 스피커에서 “문이 닫힙니다.”라는 안내음이 울렸다.
그 바람 속엔 분명 주주의 냄새가 남아 있는 듯했다.

집 앞 골목, 노란 문, 그리고 꼬리를 흔들던 주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따뜻한 일이구나.’ 주희는 그 생각을 품은 채 학교로 향했다.

부동산 앞을 지날 때, 주희의 시선이 문득 멈췄다.
길가에서 낯선 강아지 한 마리가 종이봉투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털은 엉켜 있었고, 눈빛은 어딘가 불안했다.

‘혹시… 주주도 나중에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봄바람이 불었지만, 가슴 한켠이 싸늘해졌다.
대문 밑 틈으로 빠져나가 길을 잃어버리는 상상이 아침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희야!” 밝은 목소리에 주희는 고개를 돌렸다.

시영이가 하얀 가방끈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응. 근데 있잖아, 혹시 주주가 혼자 밖으로 나가면 어떡하지?”
“응? 주주? 주주가 누구야?”

주희의 머릿속에는 온통 집에 혼자 있는 주주 생각뿐이었다.
“사실 어제 강아지를 선물 받았어. 내가 이름을 지어줬어. 주주라고 해.”

시영이는 활짝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에이~ 그런 일 없을 거야. 얼른 가자!”

주희는 그제야 웃었다. 조금 전의 걱정이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두 아이의 발소리가 나란히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교정의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두 번째 수업은 그림 시간이었다.
선생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카세트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희는 노란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도화지 위에 동그란 귀, 짧은 다리, 작은 눈을 천천히 그려나갔다.

“주희야, 그게 뭐야?”
주희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으며 색을 덧칠했다.
도화지 속 주주는 마치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 생생했다.

창가로 부는 바람이 커튼을 밀며 흔들렸다.
그때마다 햇살이 부서져 들어와 주희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지금쯤 주주는 뭐 하고 있을까?’ 주희는 연필을 굴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햇살이 드는 마루에서 잠들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창밖을 보고 있을까.’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온통 머릿속에는 집에 있는 주주 생각뿐이었다.

그런 주희를 이해하면서도 시영이는 살짝 서운했다. 그래서 3교시부터는 주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희는 그런 시영이의 마음도 모른 채 여전히 주주 생각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주희는 가방을 메고 학교를 나섰다. 빠르게 교문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등굣길엔 지하철을 타지만, 하교 때는 늘 버스를 타곤 했다. 조용한 오후, 창밖 풍경을 천천히 볼 수 있어서였다. 버스 창문 밖으로 벚꽃 잎이 스쳐 지나갔다.

주희의 마음은 이미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주주는 잘 있었을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노란 대문 앞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멍! 멍!” 주주의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자, 주주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달려 나왔다.
“주주야, 나 왔어.”
주희는 웃으며 얼굴을 비볐다. 주주는 주희의 뺨을 핥으며 반가움에 몸을 비틀었다.
햇살이 마당 끝까지 스며들었다. 마치 세상에 주희와 주주 둘만 존재하는 듯,

너무나 애틋했다. 작은 마당 안에서 둘은 빙글빙글 돌며

쉼 없이 서로를 쫓았다. 그 작은 세상 속에서 웃음소리가 흘렀다.

해가 저물 무렵, 벽시계의 초침이 “짹-짹-짹” 소리를 냈다.
잊고 있던 숙제가 생각난 주희는 주주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풀자 일기장과 문장 쓰기 숙제장이 나왔다.

더 놀고 싶은 주주는 귀를 쫑긋 세운 채
문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들며 주희를 바라보았다.
문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올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듯했다.

“엄마 곧 오시겠지?” 주희가 속삭이자, 주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둘은 눈을 마주쳤고, 주희는 활짝 웃었다. 그러자 주주가 주희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 부드러움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감쌌다.

그 순간, 현관문 손잡이가 돌아갔다.
주주는 번개처럼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따뜻한 목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주희야, 엄마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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