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촌에 처음 들어오고 놀랐던 건 생각보다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였다. 보통은 공부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일은 없지만 학원에서는 경제학에 한하여 스터디를 짜준다. 현장강의를 듣다 보면 이해가 안 가더라도그냥 넘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최근 강의의 인강을 보면서 복습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데 그럼에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존재한다. 스터디의 목적은 강의에서 이해 못한 부분을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 보라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가더라도 학원 스케줄은 수레바퀴처럼 굴러간다. 멈추지 않고. 이걸 순환이라고 부른다. 예비순환, 1 순환, 2 순환, 3 순환까지 있다. 3 순환의 1년 반 과정을 모두 수강하면 이론상으로 전 과목을 4번 정도 보는 셈이다.
스터디가 결성되면그날 배운 부분의 연습문제를 같이 정하여 풀어온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팀원들 앞에서 설명한다. 풀고 설명까지 할 수 있어야 서술형 시험에서 답안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터디를 비롯하여 고시촌에서 만나게 된 여러 사람들이 크게 3가지로 나뉜다.
1. 인생의 쓴 맛은 모르는 SKY대학생
첫 번째는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학생들이다. 보통은 1학년 내지 한 학기 정도 다니고 고시에 입문하며 심지어 학교를 다니면서 시작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의 입문 과정은 선배가 하니까 따라서하거나 친구 따라 온 경우도 있다. SKY에서는 전공을 막론하고 고시공부는 흔한 편이다.
입시의 문턱을 넘을 때 이미 공부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 차있고 그 기분을 간직한 채로 자신 있게 고시촌으로 들어온다. 처음 스터디에서 만난 멤버들은 절반이상이 SKY에 재학 중이었고 1학년만 마치고 공부를 시작한 21살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 나이에 군대 간다고 가기 전에 열심히 놀고 있었는데...'
누구는 벌써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는 나이이다.
이 부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인생의 좌절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다. 그 자신감이 빠른 합격을 불러오기도 하고(최연소 합격) 빠른 좌절을 불러오기도 한다. SKY라고 해도 1년에 합격하는 숫자는 정해져 있고 대부분 좌절을 맛보기 때문이다. 1년 해보고 아닌 거 같으면 빠르게 발을 빼는 경우도 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심기일전하는 친구들도 있다.
이 친구들을 보며 느낀 것은 세상에 정말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들을 넘어서야 합격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다는 것이 거대한 장벽처럼 다가왔다.
2. 20대의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
인생의 도전이라는 말이 거창하지만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20대 중반까지 대학 입시 외에 크게 도전할 일이 없이 자라기 때문에 도전이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부모가 시켜서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있지만 다들 저마다의 큰 뜻을 품고 고시 생활에 입문한다.
나도 그 부류 중 하나였다. 학교도 절반이상 다녔고, 군복무도 마쳤고 이제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정진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 친구들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가장 의욕이 넘치고 공부도 오래 하는 부류에 속한다. 20대 중반의 혈기를 공부에 쏟으면 어마어마한 시너지가 난다. 그때는 몰랐지만 돌아보면 공부체력도 받쳐줬고 두뇌회전도 적당히 빠르며, 적당히 세상물정을 아는 상태였다.주변에 대학동기들이 하나둘씩 취업을 하고 직장인 친구들이 생기기 때문에 사회의 달콤함과 속세와의 단절 사이에서 흔들리기 쉬운 시기이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른 꿈을 찾아 만학도가 된 분들도 있다. 그간 모은 돈을 과감히 고시에 투자하기도 한다. 그분들의 나이는 각양각색이다. 어쨌든 제2의 시작인 셈이다.
3. 장수생, 그리고 길을 잃은 사람
장수생은 어느 시험에나 존재한다. 정말 열심히 하다가 운이 계속 안 좋아서 한두 문제 차이로 계속 불합격하여 장수생이 된 경우도 있고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장수생들은 주로 자습 스터디나 문제풀이 스터디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강의는 들을 만큼 들었기 때문에 각자상황에 맞게 부족한 과목을 채우려고 한다.
나도 4년이라는 나름 장수의 길을 거쳤지만 장수생이 되는 루트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5급 공채 시험은 실력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시험을 보고 나서 점수로만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시험은 몇 년 만에 합격권 점수에 못 오르면 그만둬라 하는 기준점이 있다. 그건 객관식 시험에 해당하는 얘기다. 하지만 고시는 과목당 서술형 답안지를 10장씩 써서 제출하기 때문에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한다. 특히 경제학 계산문제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가 아닌 이상 다른 과목으로는 내 위치를 알기 힘들다. 수험기간도 천차만별이다. 빠르면 3년 만에 붙어서 나가는 사람도 있고 5년 이상 공부하는 사람도 흔하기 때문에 더 가야 하는지 중단해야 하는지 기준을 잡기가 어렵다.
고시생의 시간은 금방 간다. 학원강의를 따라가며 1차, 2차 시험까지 보고 나면 1년 반이 지나고 여름이 된다. 1년 반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가을바람이 불고 불합격한 사람들은 내년 봄에 있을 1차 시험을 다시 준비하기 시작한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1년이 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몇 년도를 살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언제 붙을지 모르고 나도모르게 장수생이 되어간다. 내가 공부를 그만두면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던지, 언젠간 합격할 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시간을 버티는 중이던지. 붙을 때까지 사회인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시험준비생'의 신분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