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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니 비로소 보이는 문장, 가슴이 '쿵' 합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재독 하며

by 김남정

어떤 책은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다시 마주해야만 비로소 문장이 살아 움직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바로 그랬다. 젊은 시절 읽었을 때는 사랑 이야기와 철학적 사유가 얽힌 이 소설이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재독 하면서 인물 하나하나의 선택과 감정을 노트에 기록하자 비로소 쿤데라가 말하는 '가벼움과 무게'가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생의 여러 겹을 지나 다시 마주한 지금,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묵직한 돌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유럽 현대사의 변곡점을 온몸으로 통과한 인물이다.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침공, 망명, 단절과 사유의 축적. 그의 소설은 개인의 삶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얼마나 무력해지고, 동시에 어떻게 자기만의 자유를 찾아가는지 탐구한다. 그의 삶이 곧 작품의 문제의식이 된다. 그중에서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가장 널리 읽히는 그의 대표작으로,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이 배경이다. 시대가 무거울수록 개인의 삶은 더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은 다시 인간의 의미를 흔든다. 쿤데라가 포착한 것은 바로 그 '삶의 균열'이다.


사랑에 담긴 자유와 무게


IE003552535_STD.jpg ▲책표지 ⓒ 민음사


세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쿤데라가 말하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어떻게 삶 속에서 현실적인 갈등으로 나타나는지 선명해진다.


토마시는 자유를 사랑한다. 책임을 떠올리면 숨이 막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가벼움을 선택한 사람이다. 자유를 위해 사랑을 경계하고, 관계보다 순간의 충동을 신뢰한다. 그는 많은 여성을 만나지만 그 어떤 관계에도 무게를 싣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감정의 책임이 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느낀다.


반면 데레사는 정반대다. 그녀는 사랑을 무게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사랑은 그녀에게 존재의 중심이며, 그 무게가 때로는 고통이 되더라도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토마시의 불안정한 사랑조차 그녀의 존재와 결부된다. 데레사는 고통을 끌어안지만, 그 무게 덕분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녀의 사랑은 불안과 상처를 동반하지만, 토마시를 향한 깊은 충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비나는 배신을 통해 자유를 지킨다. 프라하의 억압 속에서 배신은 그녀에게 진실한 자유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유는 영원히 가볍지 않다. 배신이 반복될수록 고독의 무게가 더 깊어진다. 이 세 인물의 삶은 단순한 사랑의 도식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충돌을 세 방향에서 보여주는 생생한 모형이다. 독자인 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떤 가벼움을 원하고, 어떤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진실을 감추고 싶은 인간의 오래된 본능


이 인물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쿤데라가 왜 '키치'라는 개념을 작품 전반에서 강조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가 말하는 키치는 단순한 속된 미학이 아니다. 인간이 진실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할 때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감상의 세계이다. 꽃밭만 보고 흙을 보지 않는 태도. 자기감정을 미화하기 위해 현실을 삭제하는 위험한 충동이다.


토마시가 자유만을 '쿨함'으로 미화한 사랑도, 데레사의 희생과 헌신만을 정답처럼 그려내는 해석도, 사비나의 방황을 예술적 자유로만 바라보는 시각도 모두 키치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택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모순되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의 추함을 지우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보기 좋은 의미'만 꺼내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쿤데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키치를 해체하며 말한다.

"아름다운 것만을 선택하고, 고통을 버리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한다."


40년 전에 쓰인 문장임에도 지금 시대의 감정 소비 구조와 닮아 보여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재독을 하면서 이 부분은 나에게 큰 질문을 남겼다.


"나는 내 삶에서 어떤 진실을 지우며 살았던가?"


키치를 경계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겠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인간을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등장하는 문장이 바로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이다. 베토벤의 악보에서 온 이 말은 작품 속에서 하나의 상징이자, 인물들이 도망칠 수 없는 삶의 필연을 가리킨다.


토마시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가벼움을 선택했지만, 결국 데레사라는 한 사람을 떠날 수 없다. 데레사는 사랑의 무게를 짊어지며, 그 무게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비나는 가벼움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지만, 그 가벼움이 오래도록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쿤데라는 조용한 진실을 내민다. 가벼움은 유혹적이며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국 인간은 어떤 '그래야만 하는 순간'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 순간은 때로는 사랑이고, 책임이며, 포기이기도 하다. 삶은 가볍게 시작될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무게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세월이 흐른 지금 더 명징하게 다가왔다.


재독 하면서 이 문장에 특히 밑줄을 그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동시에 의미를 원한다."


그 의미는 결국 우리가 받아들인 "무게"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 무게는 때때로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나의 언어로 다시 읽다


재독 하며 새삼 느낀 것은 이 책이 단순한 철학 소설도, 복잡한 사랑 이야기만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소설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삶의 내밀한 거울에 가깝다. 가벼움을 꿈꿨던 순간, 무게가 두려웠던 순간, 그러나 결국 선택해야 했던 필연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쿤데라의 문장은 나이가 들고서야 비로소 들리는 문장들이 있다.


"인간의 삶은 단 한 번뿐이며, 우리는 그 한 번을 되돌릴 수 없다."
"사랑이란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다."


이 문장들은 첫 독서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의 내 삶을 통과하며 깊은 울림으로 변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재독 할 때 비로소 제대로 읽히는 책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쿤데라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가벼움은, 참을 수 있는가?'


이 책은 쉽지 않다. 사랑, 정치, 철학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독자의 사고를 시험한다. 그러나 그만큼 삶을 깊이 성찰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노트에 기록하며 읽으면, 쿤데라의 문장이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재독의 힘을 강하게 느낀 작품이었다.)


#밀란쿤데라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체코 #프라하의 봄 #민음사세계문학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4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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