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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했잖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다짐에 대하여

by 김남정

차가워진 공기, 따사로운 햇빛,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파란 하늘, 서서히 물들고 있는 나뭇잎들. 계절이 이렇게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걸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언제나 자신이 '가을'임을 숨기지 않는다. 낙엽이 떨어지는 일조차 자신의 리듬이라 말하듯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익어간다.


나는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면 모두 친구다'

누구의 기준도 아닌, 내 안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가면 이상하게 세상과도 다정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늦더라도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지난 주말 큰 딸과 한강을 걸었다. 봄에는 벚꽃이 한강변을 수놓았고, 여름엔 녹음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한강변. 그날엔 불긋한 낙엽이 강바람에 흩날렸고 햇살에 반짝였다. 똑같은 산책길이 계절마다 다른 풍경으로 우릴 반겨준다.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뛰기도 하고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딸이 말했다.

"엄마, 이런 시간이 참 좋아. 아무 말 안 해도 마음이 편하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가 지켜야 할 시간이다. 삶의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마신 커피와 딸과 나눈 대화는 온전한 시간이었다.


그날 저녁 부엌에서는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청양고추를 넣어 그 매콤함이 차가워진 공기와 닿았다. 진하게 익어가는 된장찌개 냄새에 가족의 얼굴이 스친다. 따뜻한 숨결이 머무는 저녁, 그건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하루를 잘 살아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 같은 것이다.


며칠 전 다시 펼쳐 든 책,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이런 문장을 밑줄 그었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문장에 한참을 머물렀다. 우리 모두 어쩌면 인생의 절반을 '누군가처럼 살기 위해'애쓰며 보낸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자신뿐이다. 남들이 그려준 선 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으로 인생을 그리는 일.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흔들림조차 내 일부로 받아들인다. 밀도 있게 지내는 하루하루 속에서, 내 안의 온도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오늘의 사소한 일기, 끓는 냄비의 김, 한강의 물결, 손끝에 남는 따뜻한 된장찌개 냄새.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루는 삶의 결이다.


겨울이 오기 전, 나는 다시 다짐한다. 누구의 인생도 아닌,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내가 선택한 일,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가 믿는 가치들을 조금 더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오늘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런 생각을 했잖아. 지금처럼 살자고.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나의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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