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닿을수록, 더 멀어진다
(앞 글 '기술의 발전'과 유사한 내용입니다)
기술은 친절하다. 전화도, 메신저도, AI도 “언제든”을 약속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손만 뻗으면 닿는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적게 음미되고 더 쉽게 미뤄진다. 풍요는 희소성이 하던 일을 지워버린다. 기다림과 수고가 사라질 때, 만남의 온도와 말의 밀도도 함께 옅어진다.
예전에는 친구를 떠올리면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었다. 편지는 느렸고, 전화는 비쌌다. 그래서 우리는 더 오래 생각했고 계획했다. 만남이 성사되면 서로 나눌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갈고 닦았다. 그 과정이 ‘애틋함’—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감정의 잔광—을 키웠다. 지금은 반대다. 우리는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심지어 아무 말도 없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훑어보기만 해도 서로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느낀다. 하지만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거리에 나가 공기를 느끼는 것과 다르듯,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실제 그 곳에 가는 것과 다르듯, 친구들의 일상을 훑어보는 것과 대화는 다르다. 타임라인을 스치며 얻는 ‘연결감’은, 얼굴을 마주하고 숨을 섞는 시간과 다르다. (혹자는 이 묘한 상태를 ‘연결돼 있지만 부재한 현존감’이라고 부른다. 핸드폰이 곁에 있는 한 늘 함께 있는 듯한 착각, 그러나 정작 깊이 만나지는 않는 상태다.)
물론 예외가 있다. 멀리 떨어진 가족, 장거리 연인, 이동이 어려운 이들처럼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통신 기술은 생명줄 같은 다리가 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전만큼 만나지 않고 문자와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로 만남을 대체하는 것, 혹은 만나더라도 금세 스마트폰 화면을 펼치고 대화는 얕아지는 익숙한 상황은 우리에게 '만남'을 대체할 무엇을 주고 있는가?
기술이 접촉의 빈도를 올려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쉽게 지인들과 접촉할 수 있다. 짧고 잦은 안부, 일정 조율, 이모지 몇 개로도 우리의 일상은 이상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빈도'가 '깊이'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고 잦은 접촉이 긴 호흡의 만남을 대체하고, 그 자리를 “서로를 음미하는 시간” 대신 “서로를 관리하는 루틴”이 차지할 때가 있다. (인터넷·모바일 사용이 네트워크의 크기는 키우지만 그것이 친밀감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연구도 있었다.)
사람들의 외로움이 증가하는 현상은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도시 구조, 노동 시간, 가족 형태, 종교 공동체의 약화 등 여러가지 원인이 겹친다. 확실한 것은 접속의 풍요가 곧 관계의 풍요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도구가 넘치는 시대에도 외로움은 공중보건 이슈가 되었다. 기술은 배경일 뿐이고, 인간적 실천이 핵심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는 만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AI를 쓰는 것도 비슷하다. 검색창과 AI 챗봇은 '알고 싶은 것'을 즉시 꺼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디서 찾는지 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과 혼동한다. 인간의 뇌는 재미있게도,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를 더 잘 기억하도록 바뀔 수 있다(일명 ‘구글 효과’). 정보의 위치를 기억하는 능력이 자라나는 대신,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어 복기하는 습관은 쉽게 줄어든다. 이것이 곧바로 '인간이 덜 똑똑해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외부 저장소를 잘 쓰는 것도 지능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머릿속의 지식'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는 안심'을 구분하지 않으면, 통찰의 깊이는 얕아질 수 있다.
AI는 인간을 무디게 만들 수도, 날카롭게 만들 수도 있다. 글쓰기·고객응대 같은 일에서 AI가 인간의 생산성을 확연히 증대시킨다는 점은 굳이 논문을 찾아보지 않아도 직접 체감할 수 있다. 문제는 'AI를 어떻게 쓰느냐'이다. 답을 대신 써주는 AI는 단기 성과를 올리지만, 스스로 설명하고 되새기고 내 것으로 전이하는 힘은 줄일 수 있다. 반대로 질문을 던지고, 근거를 요구하고, 토론을 통해 잘못된 개념을 바로잡아주는 ‘소크라테스형 AI'는 우리 생각의 체력을 키울 수 있다. 같은 망치로 못을 박을 수도, 유리를 깨뜨릴 수도 있는 것처럼.
이 글은 기술 비판도, 기술 찬양도 아니다. 기술을 인간답게 쓰는 법을 되살리자는 제안에 가깝다.
‘만남’을 다시 의식화(ritual)해야 한다. 무조건 대면으로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주 1회 20분 영상통화, 월 1회 ‘길게 쓰는 편지’ 같은 리듬을 정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친구들의 소셜미디어 피드 훑어보기는 '좋아요'로, '좋아요'는 DM 질문 한 문장으로 바꾸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에 다가가기 위한 수고를 지금보다 조금 더 하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DM, 카톡, 문자 등의 알림은 (급한 건이 아니라면) 실시간으로 응답하는 대신, 하루 두 번 '묶음'으로 주고받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우리 머릿속에 ‘한 번 더 생각하고 보내기’ 버튼을 만드는 것이다. 편리함의 과속을 살짝 늦추면, 말은 다시 무게를 가질 수 있다.
AI는 '조교'가 아니라 '선생'으로 대하는 것도 좋다. AI의 답을 무조건 믿자는 것이 아니다. AI에게 “정답을 알려줘”라고 주문하는 대신 “내가 쓴 설명을 평가해 줘”, “반론을 달아줘”, “이 개념으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줘”라고 시키는 등, 내가 더 깊이 알기 위해 AI를 부리는 것이다. AI에게는 나의 틀린 부분을 잡아달라고 하고, 반대로 나 역시 AI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며 토론을 이어간다. 인간 선생과 달리 AI는 다행히 우리의 잇따른 질문에 짜증내거나 나에 대한 평가를 깎지 않는다.
기술은 본래 중립적이다. 기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쉽게 닿는 길이 생겼다고 해서 깊이 만나는 일, 깊이 알게 되는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기다림을 만들고, 수고를 남기고, 시간을 모아야 한다. 더 의식적으로 만나고, 더 의도적으로 배워야 한다. 관계는 그렇게 영글고, 지식은 그렇게 나의 것이 된다. 기술은 그 때 비로소 내 편이 되어 나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