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이다

지각단풍, 지각벚꽃... 어쩌면 인간의 만성지각 탓

by 에코제비

[에코제비]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산다는 건 축복이다. 추위를 보내면 따뜻해지고, 더위가 찾아오면 이내 다시 서늘해지는 기후의 변화 속에, 때맞춰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는 자연을 맘껏 구경할 수 있으니 말이다. 따사로운 봄볕 속에, 쏟아지는 분홍빛 꽃비를 맞으며 걷을 때 느끼는 찬란한 기분은 봄날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여름 장대비의 시원함과 뙤약볕을 비껴간 그늘 밑에서 맛보는 수박의 달큰함이 여름날의 매력이라면, 울긋불긋 단풍길의 산책과 애처롭게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날의 묘미다. 게다가 소복이 쌓인 눈길에 발자국을 새길 때 느끼는 뽀드득한 감촉과 추위 속에 몸을 녹이는 어묵국물의 뜨끈함에는 비길 게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사계절의 축복을 오감으로 느끼며 산다.


그런데, 시기를 비껴간 축복이 몇 해째 거듭되고 있다. ‘2025년 가을 단풍 예측 정보’를 보면, 올해 가을단풍은 예년보다 일주일 가량 늦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9월까지 늦더위가 오래 지속돼, 내장산과 속리산 등 명소들의 단풍절정 시기가 10월 말에서 11월 10일 무렵으로 늦어진다는 분석이다. 11월까지 반소매를 입고 다닐 정도로 추위가 더디 찾아왔던 몇 해전 가을의 일이 떠오른다. 예측을 비껴간 기후변화가 몇 차례 반복되면서, 단풍도 지각을 하는 셈이다. 늦게 찾아오는 건 단풍뿐이 아니다. 벚꽃 개화시기가 늦어져 지역마다 벚꽃축제 시기를 가늠하느라 애를 먹는다는 소식이 벌써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지각 개화한 벚꽃 탓에, 축제 기간을 잘못 예측한 지자체들이 벚꽃 없는 벚꽃 축제를 진행해야 할지 당황해하던 봄철의 일이 기억난다. 늦게 찾아오는 가을과 봄도, 늦게 물러나는 여름과 겨울도, 모두 지각이다.


오랜 기간 축적된 기후 정보들은 그해의 개화시기나 단풍시기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지만 급격한 기후변화 탓에 그간의 자료들이 쓸모를 잃고 있다. 계절의 변화가 예측을 비껴가는 것이다. 매일 달라지는 날씨를 일컫는 ‘기상’과 달리, ‘기후’는 여러 해 동안 되풀이된 기온과 바람, 강수의 평균을 말한다. 최근 30년간의 자료를 기준으로 산출하던 기후는 점차 변화의 폭이 커지면서 최근 10년 평균값을 구해 지표로 사용하고 있는데, 개화나 단풍시기를 예측할 뿐 아니라, 어느 지역의 생태계와 작물 재배 등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각단풍과 지각벚꽃은 이례적으로 뜨거워진 지구가 만들어낸 결과 중 극히 일부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정보의 불확실성은 우리의 예측을 벗어날 정도로 크고 다양해지고 있다.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 지난 10일(2025.11.10),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기로 의결했다. 위원회가 의결한 ‘2035 NDC(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에서 제시한 하한선인 53%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2018년부터 해마다 같은 비율로 온실가스를 감축한다고 가정할 때 2035년에 이뤄내야 할 감축률을 말한다. 반면, 상한선인 61%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지구 온도의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하로 낮출 가능성이 50%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제시한 권고 수준이다. 최소한 53%는 달성해야 하지만, 불행히도 하한선에 도달하기에도 현실적으로 버거운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달성하기에 너무 도전적인 수치라며 우려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은,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미온적 목표라며 비판한다.


보다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해야 했다는 비판도, 현실적으로 달성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수치라는 우려도 옳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충분한 목표를 제공하지 못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뤄내기 어려운 과제라는 양 극단의 비판을 듣게 된 데에는 지금까지의 늑장대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줄곧 지구를 뜨겁게 달구며 탄소배출에 기반한 성장에만 열중한 나머지, 온실가스 감축에는 더디게 움직여왔으니, 이를 만회할 시간과 여력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고 보면, 이 사달이 나기까지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방치하다 이제야 허둥지둥하는 인간의 만성적인 지각행태에, 어쩌면 자연마저 지각단풍과 지각벚꽃이라는 느림보 걸음으로 발을 맞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