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움직이게 만든 성장, 사람, 그리고 조직 문화
번외 편
저는 지난 6월에 이직을 했습니다. 전 직장은 국내 로컬 컨설팅펌이었고, 기존 공공경영, 진단평가, 교육 영역에서 IT/디지털 영역으로 사업 확장을 위해 신설된 부서에 초기 멤버로 합류하여 부서의 성장을 함께 했습니다. 약 2년 8개월을 지내면서 부서장과 인턴을 포함한 5명 남짓되던 부서에서 50명이 넘는 규모로 부서가 성장해 오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한 것 같습니다.
시작과 큰 성장을 함께 해왔던 조직에서 퇴사를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학습곡선(Learning Curve)이 꺾였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학습곡선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개인적인 역량 등 내부 요인에 따를 수 있지만, 조직 운영이나 인간관계 등 외부 요인에 따를 수도 있습니다. 회사원으로서 '주니어(Junior)'급에 해당하는 저로서는 어느 정도 '배울 점이 있는 시니어(Senior)'를 필요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직을 결심할 시점에 제게 그런 시니어(또는 사수)는 없었습니다. 정말 없었습니다.
물론, 전략, 기획, 리더십, 사업 관리, PM/PL 등 저연차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해오면서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스타트업을 경험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1. 왜 떠났는지
첫 번째 이유는 '실행'에 대한 욕구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전문성은 실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 경험을 통해 쌓인다고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개발자나 엔지니어에게 트러블 슈팅 경험이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직무에 무관하게 전문성을 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컨설턴트는 고객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방안을 제안하는 사람일 뿐,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략적/논리적/구조적 사고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야가 넓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직업이지만, 특정 분야에 Deep Dive 하여 전문성을 쌓아 전문가(Specialist)가 될 수 없는 직업입니다.
저는 'T자형 인재'를 지향합니다.(요즘 대세이기도 하죠?) 초반에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서 넓은 식견을 갖추려고 노력했고, 이직을 결심하는 시점에는 이젠 전문성을 가진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적합한 회사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사람은 크게 역량과 인성, 두 가지 형태의 사람입니다.(둘 다 갖추는 것이 Best...) 제너럴리스트도 전략적/논리적 사고, 다양한 프레임워크 등 무기를 갖고 있어야 하고, 그 무기는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존의 것을 다듬고 날카롭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워낙에 바쁘니까 노력을 기울일 시간도 힘도 없을지도...) 무엇보다 제안 전략을 수립하거나 큰 그림을 바라보는 전략적 사고를 '잘(well)'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있었지만, P사로 이직해 버리는 바람에...) 컨설턴트 최대 장점인 역량을 배우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성'을 갖춘 사람이 필요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본인이 잘못했지만 인정은 하지 않고, 오히려 제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 리더에 위치했고 승승장구했습니다. 인격적으로 폄훼하고 객관적인 성과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적절한 보상도 해주지 않았고, 무엇보다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 큰 이직 사유였습니다. (당사자가 보더라도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 떠나서 이간질은 좀...)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조직 문화'였습니다. 적어도 IT, AI, 데이터 기술을 내세운 조직이라면, 최소한 개발자나 엔지니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더욱이, 솔루션 기반의 컨설팅펌으로 거듭나겠다고 공표했다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퇴사 후에 솔루션을 완성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을 개선 또는 운영할 수 있는 내부 역량이 전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배운 것
저는 운이 좋게도, 첫 번째, 두 번째 프로젝트 PM이 실력 있는 분 들 이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전략적/논리적 사고를 배우고 끝없이 훈련받았고,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이나 논리 구성 등 컨설턴트라면 갖춰야 할 역량을 얻었다고 자부합니다. (이 경험은 저희 부서에서 저 포함 2명만 겪은 귀한 경험이라고들 말했습니다.)
또한, 적은 연차 때 대규모 사업 PM/PL 경험도 다수 했고, 직접 AI 서비스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도 했고, Product Owner로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제안서와 보고서를 쓰면서 기획력 자체도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위의 배웠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객관적인 산출물과 사내 평가도 받았습니다. 확실히 저는 초창기에 들어와서 많은 기회를 얻었고, 양질의 경험들을 했습니다.
현재 사업전략 기획/개발자로 일할 수 있던 성과도 있었네요. 새로운 사업 영역을 기획하고 실행했고, 2년 간 회사에 사업 규모 약 150억 원을 수주하기도 했네요. 일이 많아서 정말 힘들었지만, 정말 많이 배웠고, 값진 경험을 했습니다.
퇴직 사유.
데이터센터 초기부터 DX 그룹까지 한 부서의 성장을 함께 해오며, 훌륭한 부서장님과 선배님 그리고 좋은 동료분들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음에 깊은 감사함을 느끼며, 상기 본인은 개인의 사유로 2024년 00월 00일 자에 사직하고자 합니다.
3. 만약에 ~~ 했더라면,
만약, 회사가 명확한 비전과 방향성을 가지고, 그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했다면, 저는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 한 사람만 아니었으면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솔루션 기반 컨설팅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에 맞춰 실력 있는 개발자와 엔지니어를 채용했더라면, 컨설팅업이라면 기본적으로 배우고 갖춰야 할 역량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공공 중심에서 벗어나 특정 산업을 타겟팅 해서 진입할 수 있는 전략이나 방법이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덜 바빴다면... 아마 지금도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초기에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과 일단 부딪혀서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면, 어느 정도 성장 후에는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과 방향성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년대비 매출 2배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요. (목표 매출의 근거라도 좀...)
4. 앞으로의 계획
명확히 정해지진 않았지만, 특정 도메인 지식을 갖춰가고 싶네요. 또는 공공 중심이 아닌 민간 시장에서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많은 기회와 경험을 가져 보고 싶었습니다. 도메인은 제조, 에너지, 금융 해보고 싶습니다. (ㅎㅎ) 무엇보다 실행 과정에서 트러블 슈팅 경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퇴사하면서 회고를 정리하지 않았던 점이 아직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앞으로의 회사생활이나 커리어의 방향성에 참고할 수 있는 회고록의 성격으로 넷플릭스의 '퇴사 부검(Postmortem email)' 형태를 빌려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애증의 느낌이 나도록 작성했고, 사실 미워하진 않습니다. 좋은 동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운이 좋게 지금 몸 담은 부서의 동료도 참 좋은 사람들이라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