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경제] 9/15~21

by 강준형

영란은행의 항복, ‘검은 수요일’


1992년 9월 16일 영국 런던. 금융가의 시계는 정오를 향하고 있었지만,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시계는 이미 멈춰버린 듯했다. 당시 영국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해 파운드화 가치를 독일 마르크화에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로 고통받는 영국 경제와 달리, 통일 독일은 물가를 잡기 위해 가파르게 금리를 올리고 있었다. 영국은 금리를 올릴 수도,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 틈을 노린 이가 헤지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당시 62세)였다. 그는 파운드화가 고평가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거대한 규모의 파운드화 공매도에 착수했다. 파운드화 가치 하락에 막대한 돈을 베팅한 것이다. 영란은행은 파운드화를 방어하기 위해 보유고를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투기 세력의 파도에 맞서기에는 영국의 외환보유액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전 한때 영란은행은 기준금리를 10%에서 12%로 올렸고, 오후에는 15%까지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장의 매도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영국 정부는 두 손을 들었다. 존 메이저 총리는 파운드화의 ERM 탈퇴를 선언했다. 이 사태를 두고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지 소로스는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약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월스트리트의 전설로 떠올랐다.


‘검은 수요일’은 당시 집권당인 보수당의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는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시에 이 사건은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거대 투기 자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영국이 이후 유럽의 단일 통화인 유로화에 참여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훗날 브렉시트(Brexit)라는 결과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


철의 장막을 뚫은 첫 번째 악수


1959년 9월 15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전례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냉전 시대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소련의 최고 권력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미국 땅을 밟았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초청으로 성사되었으며, 양국의 긴장 완화를 위한 중요한 외교적 시도였다.


흐루쇼프의 방문은 13일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는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아이오와 등 미국 전역을 누볐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공식 연설에서 소련의 평화적 공존 의지를 피력하는 한편, 소련의 우주 기술력을 자랑하며 은근한 경쟁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아이오와주의 한 농장에서 옥수수 농사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미국 농업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소련의 농업 개혁을 다짐하기도 했다.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비공개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베를린 문제와 핵 군축 등 여러 현안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양국 최고 지도자가 직접 소통하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은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냉전의 장벽을 잠시나마 허물고 양국의 대화 채널을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단순히 ‘적’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상을 남겼고, 이는 이후 냉전의 양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작은 불씨가 되었다.


인류의 약속, 오존층을 구하다


1987년 9월 16일,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20여 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지구의 상층부, 성층권에 자리한 얇은 오존층이 프레온 가스(CFCs)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는 과학적 경고에 응답하기 위해 모였다. 그로부터 2년 전 남극 하늘에 ‘오존 구멍’이 발견되면서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몬트리올 회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긴급한 약속의 장이었다.


그날 채택된 것이 바로 ‘몬트리올 의정서’였다. 이 의정서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염화불화탄소(CFCs)와 같은 화학물질의 생산과 사용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업들의 반발과 경제적 손실 우려가 컸다. “에어컨이나 냉장고는 어떻게 만들라는 건가”, “개발도상국은 이 조치를 따르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몬트리올 의정서는 인류가 환경 위기에 맞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 대상 물질은 계속 늘어났고,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이 의정서에 가입했다. 그 결과, 오존층 파괴는 멈췄고 과학자들은 2060년경에는 오존층이 완전히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한 나라의 이해관계를 넘어 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약속이었다. 이 의정서는 인류가 단결하여 공동의 문제에 맞선다면, 그 어떤 난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또한 이 경험은 훗날 기후변화 협약 같은 국제적 환경 문제 해결 노력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스페인 왕관을 벗은 다섯 별


1821년 9월 15일, 과테말라의 수도는 축제 분위기로 들끓었다.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들었고, 독립을 향한 열망이 뜨겁게 타올랐다. 이들은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그리고 과테말라를 아우르는 중앙아메리카 총독부가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국력이 쇠퇴한 상태였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들은 이미 독립의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중앙아메리카의 독립은 무력 충돌보다는 외교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총독부의 지도자들은 멕시코의 독립을 목격하면서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스페인 총독에게 독립을 요구했고, 총독은 더 이상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승인했다. 이처럼 총칼 없이 얻어낸 독립은 중앙아메리카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독립 직후 이 지역은 잠시 멕시코 제국에 병합되었다가 1823년 분리되어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연방은 내부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1838년에 해체되었고, 결국 오늘날의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다섯 독립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9월 15일은 이들 중앙아메리카 5개국 모두에게 독립기념일로 남아있다. 비록 한 국가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날은 스페인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한 의미 있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그들은 오랜 식민지배의 굴레를 벗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얻었다.


냉전의 마지막 축제, 화해의 무대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는 오색의 불꽃과 함께 비둘기들이 평화를 상징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어 경기장 잔디 위로 ‘굴렁쇠 소년’이 등장해 조용히 굴렁쇠를 굴려 나가는 퍼포먼스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평화의 염원을 담아 전 세계인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겼다. 냉전 시대의 마지막 축제이자, 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한 화합과 평화의 무대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이 서로 보이콧하며 반쪽짜리 대회로 전락했던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달랐다. 소련, 동독,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를 포함해 당시 전 세계 160개국 선수단이 참가했다. 이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가장 많은 참가국 수였다.


대한민국은 ‘88 서울 올림픽’을 통해 경제발전의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조직적인 준비와 뛰어난 운영 능력은 한국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히 당시까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보기 힘들었던 북한이 불참하며 한민족 내부의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으나, 서울 올림픽은 냉전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외교적 장이 되었다. 소련의 최고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서울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고, 이는 훗날 한-소 수교로 이어지는 결정적 발판이 되었다.


서울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선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은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세계 무대에 당당히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선언했다. 또한 동서 진영의 화합을 도모하고 냉전의 종식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며,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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