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이라 불리는 비상조치를 전격적으로 선포한다. 국회를 해산 하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며, 기존 헌법의 일부 조항을 정지시키는 등 기존 헌정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조치였다. 단순한 헌법 개정이 아니라 대통령 중심의 강력한 권력 구조를 새로 구축한 사건으로, 대한민 국의 정치 체제를 장기간 권위주의적으로 전환시킨 분수령이었다.
유신의 가장 직접적인 배경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장기 집권의 불확실성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3선 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했지만, 야당의 거센 도전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합법적 절차만으로는 권력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형성된 남북 대화 국면을 국가 안보와 통일 과업의 명분으로 활용하면서, 강력한 지도체제 만이 국가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러한 정치·외교적 환경이 결합되며 초헌법적인 새로운 체제 등장의 배경이 마련된 것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전례 없는 수준의 권한을 부여 하였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 선거로 선출되며, 6년의 임기와 함께 연임 제한이 사라져 사실상 장기 집권이 가능해졌다. 또한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었다. 법관 임명과 헌법위원회 구성에도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영역에 실질적인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 결과 3권 분립의 원칙은 형식만 남게 되었고, 대통령 중심의 강력한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유신체제 하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었다. 긴급조치는 정권 비판과 개헌 요구를 금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민주화 운동 및 반대 세력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정권은 정치적 안정을 통한 경제 성장의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회 전반에서는 권력 집중과 통제의 강화로 인한 민주주의 후퇴가 심화되었다.
10월 유신은 당시 정권이 ‘국가적 안보’와 ‘경제적 효율성’을 명분으로 추진한 체제 개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적 절차와 권력 분립이 약화될 때 국가가 얼마나 쉽게 권위주의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유신체제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제한할 수 있는지를 드러냈으며, 이후 한국 사회가 권력 분립과 투명한 의사 결정의 중요 성을 되새기게 한 역사적 경험으로 남았다. 결국 이 체제는 부마항쟁과 같은 국민적 저항, 그리고 10·26 사태 라는 내부적 균열을 거쳐 붕괴하였고, 그 과정은 민주 주의를 향한 시민 의지가 독재를 극복하는 근본적 동력 임을 증명하였다.
1867년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광활한 영토인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당시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에 달하는 이 땅을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매입한 이 사건은, 초기에는 미국 내에서 ‘수어드의 바보짓 (Seward's Folly)’ 또는 ‘수어드의 냉장고’라며 혹독한 비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역사의 페이지가 넘어간 후, 이 거래는 미국의 영토 확장은 물론, 경제와 지정학적 미래를 바꾼 ‘세기의 거래’로 재평가받고 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매각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지정학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러시아령 아메리 카는 본토에서 너무 멀어 통치와 방어가 어려웠고, 특히 크림 전쟁(1853-1856) 패배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이 영토를 영국의 캐나다로부터 빼앗길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러시아는 우호적인 미국에 매각함으 로써 현금을 확보하고 동시에 영국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반면, 미국 측에서 거래를 주도한 수어드 국무장관은 당시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은 확고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알래스카가 아시아 무역을 위한 전략적 보급 기지로서 중요하며, 언젠 가는 그 안에 숨겨진 가치를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알래스카 매입을 둘러싼 여론은 약 30년 후 완전히 뒤집어졌다. 1896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를 비롯하여 알래스카 전역과 인접 지역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이 땅은 불모지가 아닌 기회의 땅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20세기에는 대규모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자원들은 오늘날 미국을 세계적인 에너지 강국으로 만드는 핵심 동력이 되었으니, 720만 달러의 투자가 수백, 수천 배의 이익을 안겨준 셈이다. 오늘날 알래스카는 단순히 자원의 보고를 넘어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그 가치가 극대화되고 있다. 러시 아와 불과 좁은 베링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어, 냉전 시대에는 소련을 견제하는 최전선 기지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북극 항로 개척과 관련하여 태평양과 북극해를 잇는 핵심 전략 지역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적인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제국으로 불리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시작은 1923년 10월 16일, 미국의 한 부동산 사무실 뒤편에서였다. 창업자는 월트 디즈니와 그의 형 로이 O. 디즈니로, 그들이 세운 회사의 이름은 Disney Brothers Cartoon Studio였다. 이소박한 출발은 한 청년의 창의적인 열정과 형의 헌신적인 사업 수완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동생 월트는 젊은 시절 캔자스시티에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Laugh-O-Gram’을 운영했으나 결국 파산하 였다. 그는 가진 것은 달랑 몇 가지 그림 도구와 약간의 현금뿐인 상태로 할리우드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파산 직전 만들었던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단편 영화 Alice’s Wonderland가 남아 있었다. 월트는이 파일럿 필름을 들고 뉴욕의 배급업자 M. J. 윙클러와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계약이 디즈니 컴퍼니의 공식적인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회사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월트의 예술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기반과 경영 능력이 절실했다. 이때 월트의 든든한 파트너가 된 인물이 바로 형 로이였 다. 로이는 은행원 출신은 아니지만, 재무와 행정 쪽을 맡아 동생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회사를 뒷받침했 다. 예술가인 월트와 경영자 로이의 역할 분담은 초기 디즈니 스튜디오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 디즈니는 Alice 코미디 시리즈와 오스왈드 래빗 캐릭터를 통해 인기를 얻었으나, 배급사·유니버설과의 계약 분쟁으로 오스왈드 캐릭터의 권리를 잃는 경험을 했다. 이 위기 속에서 월트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 고, 이것이 바로 미키 마우스이다. 1928년 Steamboat Willie를 통해 미키 마우스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 며,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 성공을 바탕으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설립은 단순한 사업의 시작이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대중화 하고, 창의성과 기술의 결합을 통해 전 세계인의 상상 력을 자극하는 문화 제국의 첫걸음이었다. 월트의 꿈과 로이의 현실 감각이 만들어낸 디즈니 컴퍼니의 탄생은 혁신적인 비전과 헌신적인 파트너십이 어떻게 거대한 성공 신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이다.
그리니치 자오선은 1884년 워싱턴 D.C.의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세계의 경도 0도, 즉 본초 자오선으로 채택 되었다. 이 결정은 현대 시간과 지리학의 통일된 기준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다.
19세기 중반까지 각국은 자국 중심의 자오선을 사용해 지도와 시간을 계산했으나, 철도와 국제 무역의 발달로 혼란이 가중되자 통일된 기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회의에서 영국의 그리니치 자오선과 프랑스의 파리 자오선이 맞섰다.
당시 전 세계 해상 무역을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영향력 덕분에, 이미 많은 선박이 사용하던 그리니치 기준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이로써 그리니치 자오선은 경도의 기준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니치 평균 시(GMT)가 세계 표준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