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경제] 12/1~12/7

by 강준형
아메리카를 위한 아메리카: 먼로주의의 역사적 유산


먼로주의는 1823년 12월 2일,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의회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일련의 외교 정책 원칙이다. 이 선언은 이후 한 세기 이상 미국 외교의 기본 축이 되었으며, 신생국 미국이 구세계 유럽 열강에 맞서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적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당시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막 독립했거나 독립 투쟁 중이었는데, 유럽의 신성동맹 같은 보수 열강들이 이 지역에 다시 개입하거나 식민지를 재건할 수 있다는 위협이 존재했다. 먼로주의는 이 위협에 대한 명확한 경고였다. 핵심은 유럽의 아메리카 불간섭 원칙과 아메리카 비(非)식민지화 원칙을 선언하고, 그 대가로 미국 역시 유럽의 정치적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상호 불간섭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먼로주의는 처음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을 수호하는 ‘방패’의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미국이 서반구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칼’로 변질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국력이 신장하고 팽창주의적 사고가 득세하면서 먼로주의는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문제에 개입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시한 ‘루즈벨트 귀결(Roosevelt Corollary)’은 이 변질의 정점을 보여준다. 루즈벨트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유럽 채권국들에게 빚을 갚지 못하거나 국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유럽의 간섭을 막기 위해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치안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먼로주의는 ‘유럽으로부터의 보호’를 넘어 ‘미국 주도의 일방적 질서’를 강요하는 수단이 되었고, 중남미 지역에서 깊은 반미 감정을 초래했다.


한편 먼로주의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이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국제적인 리더로 나서는 과정에서 그 영향력이 약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외부 간섭을 배제하고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역내 질서를 주도하려는 경향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같은 현대의 정치적 구호들에서 보듯 먼로주의의 유산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먼로주의는 한때 미국이 유럽 열강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로 서겠다는 용기 있는 선언이었지만, 동시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패권을 예고하는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복합적이고 양면적인 유산은 오늘날에도 국제 질서와 미국의 대외 정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잠자는 거인을 깨우다: 진주만 공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7시 55분, 하와이 진주만(Pearl Harbor) 상공에 일본 제국 해군의 항공기들이 나타나 기습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이 공격은 미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단숨에 끌어들였다.


공습 직전, 양국 관계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남아시아 확장으로 인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미국은 석유와 철강 등 군수 물자 금수 조치로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려 했고, 이에 일본 군부는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자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단기적인 대승을 통해 미국의 참전 의지를 꺾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진주만 기습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강한 보복 의지를 과소평가한 중대한 오판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의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약 350대의 항공기들이 진주만을 두 차례에 걸쳐 공격했다.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으며, 정박해 있던 전함들이 주요 목표였다. 이 공격으로 미군 전사자 약 2,403명을 포함해 약 2,471명이 희생되었고, 전함 8척이 침몰하거나 크게 손상되었다.


공습은 전술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일본은 결정적인 목표물들을 놓쳤다. 가장 중요한 미 해군의 항공모함 3척은 당시 진주만에 없어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한 진주만의 핵심 시설인 정유 시설과 수리 시설 역시 무사했다. 이 시설들이 건재했기에 미 해군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전력을 회복하고 반격할 수 있었다.


한편 진주만 공습은 미국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다음날인 12월 8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2월 7일을 “치욕의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로 규정하며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했고,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를 승인했다. 이로써 미국은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먼로주의 이래 고립주의를 고수했던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세계 대전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막강한 산업 생산력과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전시 체제를 구축한 미국은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진주만 공습은 일본에게 전술적인 승리였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 자신들을 패망으로 이끈 전략적 재앙이었다. 이 사건은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열었으며, 전후 세계 질서에서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1991년 12월 1일에 실시된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민투표는 단순한 투표 행위를 넘어, 20세기 후반 유럽의 지정학적 지도를 영원히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 투표는 러시아혁명 이후 줄곧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가 주권 독립국가로 거듭나는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나아가 소련의 최종적인 해체를 촉진하는 쐐기를 박았다.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8월 24일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국제적 인정과 국내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직접적인 의사 확인이 필요했다. 이것이 12월 1일 국민투표의 목적이었다.


투표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약 3천 2백만 명의 유권자가 참여한 가운데 90% 이상이 독립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단순히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동부의 돈바스 지역과 남부의 크림반도 등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지역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컸다.


국민투표의 압도적인 결과는 우크라이나의 독립 의지가 전 지역에 걸친 민족적, 정치적 합의의 산물임을 명백히 입증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강한 핵심 공화국이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단순한 영토 축소를 넘어 소련 연방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2월 1일 국민투표가 실시된 지 불과 일주일 후인 12월 8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슈케비치 세 지도자가 벨라베자 숲에 모여 벨라베자 조약(Belovezh Accords)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을 공식 선언했으며,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민투표가 곧바로 소련의 종말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불러왔음을 증명한다.


노예제 폐지, 미국 수정헌법 제13조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는 단순히 헌법 조항 하나를 추가한 사건이 아니다. 미국 건국 이래 지속되어 온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재정립한 역사적 대전환점이다. 1865년 12월 6일에 비준되어 공식 발효된 이 조항은 “미국 내 또는 그 사법권이 미치는 어떤 장소에서도, 범죄에 대한 처벌을 제외하고는, 노예제도나 비자발적 하인 제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slavery)를 영구히 폐지했다.


미국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 선언문의 이상을 내걸고 탄생했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재산으로 취급하는 노예 제도를 허용하는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 모순은 결국 1861년에 남북 전쟁(Civil War)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발표한 노예 해방 선언은 남부 연합에 속한 주들의 노예만을 해방시키는 전시 조치였을 뿐, 모든 주에 걸쳐 노예제를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따라서 전쟁의 승리를 통해 연방을 재통합한 후, 노예제를 헌법적으로 영구히 금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수정헌법 제13조는 노예 해방을 일시적인 전시 법률이 아닌, 미국 헌법의 영구적인 원칙으로 확립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는 남북 전쟁의 가장 큰 성과이자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인권을 향한 중대한 진전이었다. 이 조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건국 이념을 뒤늦게나마 실현하려 했던 숭고한 노력의 산물이자,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의 인종적, 사회적 정의 문제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근본 규범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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