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주워본 적 있나요?

by 양탕국
책은 어려운 게 아니야


지난 2015년, O tvN 채널에서 매우 새로운 형식의 책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컬투, 데프콘 등 책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연예인과, 조승연 등 책벌레 같은 패널들이 함께하는 <비밀독서단>이라는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 책 소개 프로그램이라면 늘 작가와의 대화 코너가 껴 있는 교양 프로그램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렇게 즐겁고 어렵지 않게 책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니, 어떤 의미론 충격이었다. 솔직히 이런 프로그램은 방송작가로서 내가 만들고 싶은 포맷이기 때문. (특히 서양음악과 서양미술을 쉽게 다루는 교양기 뺀 프로그램을 꼭 런칭하고 싶다.)

이 프로그램이 전해준 가장 큰 메시지는 누구나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즉, “책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취미가 독서라 하면 “고상한데?” “있어보인다” 같은 말들을 종종 들을 터. 사실 이 취미도 게임이나 음주가무처럼 재밌어서 하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마치 부르주아 흉내라도 내려는 사람 취급을 받을 때면 치켜세우는 말에도 묘하게 기분이 나쁜 경험, 한두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했던 말들. “일단 읽어 봐. 고상한 책만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책을 통해 공감할 수 있다.


‘비밀독서가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비밀독서단>에선 세 권의 책을 소개한 후 프로그램 말미에 그 주의 책을 선정했다. 그리고 에필로그엔 늘 패널들이 그 책을 어딘가에 남모르게 두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걸 보며 ‘저 책 한 번 주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남의 물건 주워다 갖는 게 무슨 큰일날 소리냐 싶지만,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한번쯤 소망했을 것이다. 어느날 내가 들른 카페 테이블에 비밀독서단 띠지가 둘러진 책이 놓여있다면? 그게 책을 잘 읽지 않던 사람들(패널들)까지도 재미있다고 추천한 책이라면? 그 책이 너무 궁금한데, 그걸 줍는다는 건 횡재잖아!

하지만 나에겐 비밀독서단의 패널들이 남긴 책을 줍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역으로 생각해 봤다. 내가 비밀독서단처럼 해보면 어떨까?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남기고 온 알랭 드 보통의 <the course of love>


마침 여행을 다닐 때마다 현지에서 책을 사서 보곤 하는데 그것들은 결국 짐이 되기도 하니, 책을 읽고 싶은 누군가를 위해 책을 두고 온다는 건 나에게나 그들에게나 꽤 괜찮은 일이잖아!

나는 그룹이 아니고 혼자니까 비밀독서단은 아니고- 그렇게 시작한 게 바로 ‘비밀독서가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일이다. 그리고 첫 책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남긴 알랭 드 보통의 <the course of love> (한국판;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다.


당신이 이 책을 본다면, 주울 건가요?


첫 책에 적은 메시지는 “이 책은 분실물이 아니야. 그러니까 관심있다면 가져가서 읽어도 좋아. 이 책을 좋아하기를 바라” 정도의 짧은 내용이었다. 지나고 보니 뭔가 아쉬웠다. 의심 많은 나 같은 사람은 ‘왜 이유 없이 책을 준다는 거야? 불량품인가?’ 하는 생각에 만졌다가도 제자리에 두고 가버릴 것 같았다. 누가 두고 간 지 모르는 책 한 권에 남겨진 메세지로 호기심과 신뢰를 동시에 줄 순 없을까?


영국 런던에 두고 온 한강의 <vegetarian>, 노르웨이 오슬로에 두고 온 같은 작가의 <human acts>


이번엔 책을 발견할 누군가에게 좀 더 친절한 메모를 남기기로 했다. 클립으로 고정한 메모지의 앞엔 To. Secret reader 라고 적고, 내용은 ‘안녕, Secret reader. 여기에 내가 이 책을 남몰래 두고 가’로 시작해 책의 내용을 설명하거나 감상 위주의 추천사를 남기는 것으로 나름의 형식을 정했다. 책을 두는 곳은 주로 내가 해당 책을 끝까지 읽기를 마친 장소가 됐는데, 그러다보니 대부분 자유롭게 책도 읽고 일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카페였다.

한창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문판을 읽고 있었기에 그 책을 그대로 올해 첫 여행지인 런던에 가져갔는데, 맨부커 상이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이어선지 때마침 런던의 서점들에선 2016년 수상작인 <vegetarian>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왕이면 내가 두고 가는 책이 남들도 궁금할 만한 내용을 담은 것이라면 더 좋을 테니까 잘 된 일이었다. 2018년의 첫 책에는 ‘이 책은 한국 작가 한강의 소설이야. 총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고 터부시되는 욕망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매력적인 책이야.’라는 내용의 메모를 남겼다.

사실 이 방법이 ‘이 책은 분실물이 아니야’ 보다 더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나라면, 짐을 덜어놓고 간 것 같은 첫 번째 경우보단 책을 확실히 읽고 추천하는 것 같은 두 번째 경우에 더 마음이 끌릴 터였다.


From. Secret reader


허나 아무리 내 손을 떠난 책이라도 ‘프로젝트’라 이름 붙이고 하는 일인데, 그 행방을 알면 더욱 재밌을 것 같았다. 지난 책들에 명함이라도 꽂을 걸 그랬나, 그건 좀 감사인사를 하라는 것 같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익명성을 보장하면서 소식을 들을 가능성도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네 번째 책부터는 비밀독서가에게 보내는 메시지 뒤에 접착메모지를 붙여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함께 적었다. ‘오든 안 오든, 메시지를 남기든 아니든 whatever’의 마음으로 만들었지만, 계정까지 생성했으니 내심 기대하게 되는 게 사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바쁘고, 내 책은 누가 가져가긴 커녕 카페 마감 알바생 손에 버려졌을지 누가 안담?

그렇게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내가 두고 온 책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잘 읽히겠거니 하며 몰래 두는 책들이 한 권씩 늘어만 가던 어느 날,


비밀독서가 프로젝트의 인스타그램 / 책을 가져간 사람이 남긴 댓긍


세상에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둔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Mudigkeitsgesellschaft> (한국판; 피로사회 - 이 책은 원판이 독일어이고, 한국어판은 번역본이다)를 갖고 갔다며, 곧 읽을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 이후로는 아직까지 또 다른 비밀독서가의 메시지를 받은 일이 없지만, 언젠간 독서 후기도 메시지로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계정 소개에 적어놓았듯, 우리는 책으로 연결되어 있고 책으로 공감할 수 있으니까.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비밀 책들,
그리고 비밀 독서가들에게


한 달 뒤, 서울로 돌아간다. 한국에선 책이 짐이 될 일도 없고, 몇 년 전부턴 주로 전자책을 읽는 터라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될지 알 순 없지만, 여건이 된다면 지속해볼 참이다.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비밀 책들과, 그 책을 가진 비밀독서가들, 그리고 앞으로 책을 통해 닿게 될 인연들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간절히 바라는 바는, 어쨌든 기뻤으면 하는 것이다. 책은 험하게 다뤄지더라도 새 독자를 만났으면, 새로운 책을 찾던 사람에게 호기심을 주었으면, 뭐가 됐든 좋았으면.


p.s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어느날 들른 카페의 한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책을 발견한다면, 책 표지에 이런 메모가 꽂혀있는지 봐주세요.


안녕하세요, 비밀독서가님. 저는 이 책을 이곳에 몰래 두고 갑니다. 이 책은...


혹시 책을 줍기로 했다면, 기쁘게 읽거나 다른 이에게 선물해주거나 뭐가 됐든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우리는 책으로 연결되어 있고, 책으로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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