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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ug 28. 2020

발자크의 끈적한 리얼 월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고 



소년은 나폴레옹의 동상에다가 이렇게 낙서했다.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위세가 얼마나 등등했는지 생각해보면 실로 웅대한 포부다소년은 이 낙서를 현실로 이루어 냈을까나폴레옹은 근대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틀어놓은 인물이다근대는 봉건적인 제약에서 풀려나온 온갖 욕망들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아수라장이었으며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공간을 품고 있었다나폴레옹은 그 시대의 단락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변화를 주도했으니그런 인물과의 비교는 분명히 소년에게 가혹할 것이다그러나 그 소년은 후에 하루 15시간씩 글을 쓰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간다그 결과 그는 프랑스 문학의 한 장을 차지할 정도의 대문호가 되었으니나폴레옹까지는 못가더라도 역사의 거인 중 하나로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발자크 본인이 저승 어딘가에서 그 낙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건 나폴레옹 선언으로부터 약 20년 정도 뒤에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남겼고 200년 정도 후에 나는 그것을 읽게 된다어린 소년의 야망 덕에 200여년이 지나서 나는 간만에 참으로 고통스러운 독서를 하게 되고이런 종류의 책이 그렇듯이 독서 후에 건져 올린 건더기가 많아서 글을 쓸 때는 더욱 고통스럽게 된다중구난방으로 떠오른 건더기들을 어지간한 지식과 통찰로는 한 줄에 꿰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몇 번의 나약한 시도 끝에 나는 그 여간 쉽지 않은 어려움에 너무도 쉽게 굴복해서 머리 아픈 얘기들을 포기하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의식의 흐름대로 적기로 한다.
 
<고리오 영감>은 크게 3명의 인물이 끌어간다고리오으젠보트랭모두 있을 법하고 적당히 드라마틱하게 각색된 인물들이다이들의 흥망성쇠는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의 격류를 보여준다몰락 중인 고리오몰락과 부활을 반복하는 보트랭생의 저점에서 도약을 준비하는 으젠인생 곡선의 각기 다른 지점에서 분투하는 인물들의 격류는 서서히 원심력을 따라 안쪽으로 모여든다이윽고 소용돌이가 되어 휘몰아친다각 인물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중요한 것은 소용돌이 안쪽 원심력의 공동이다고리오의 부성애와 눈물으젠의 야심과 고뇌보트랭의 냉소와 비열이것들은 너무도 특출나서 작품 속에서 크게 융기한다그리고 융기한 이야기의 지형은 분지가 되어 진짜 주인공을 담는 그릇이 된다. <고리오 영감>으로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나는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19세기 중반 파리라고 생각한다.
 
19세기 중반 파리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학술적으로 정밀 검증하는 것은 여기서 무의미한 일이다. <고리오 영감>의 초반부를 읽고 나면 파리의 으쓱한 골목과 지저분한 하숙으로 난잡한 뒷 세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진다마찬가지로 고리오 딸들의 행태를 읽고 나면 당시 사교계의 속 천불나는 허영과 골 때리는 낭비벽에 대해 진절머리 치게 된다. (발자크는 파리를 상류층이건 하류층이건 관계없이 모두 희망적이지 못한 인물들로 꽉꽉 채워놓았다.) 그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눈살 찌푸려지고 아주 꼴사납기 그지없는데사실 그게 바로 파리다푸아레나 미쇼노 같은 단역 엑스트라까지 각자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세상잭슨 폴록의 추상화 같은 세상잭슨 폴록이 뿌려대는 물감 줄기처럼 인물의 욕망이 뿌려지고 꿈틀대면서 파리의 카오스는 더욱 더 강렬한 생명력으로 요동친다발자크는 그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도가니에 매료된 것일까.


잭슨 폴록 <NO.8>


발자크의 파리는 확실히 질서정연하고 희망적인 코스모스가 아니다발자크는 세상에 씌여있던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와 같은 윤리도덕양심을 걷어냈다그 뒤로 남은 것은 날 것의 세상이다부녀간의 정과 사랑을 허영과 물욕이 압도하는 세상최근 유행하는 진화심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기심이 이타심을 압도하는 세상이다당시 프랑스인들 모두의 욕망이 모여드는 파리에서 발자크가 추잡한 광경에 더욱 집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당신들의 파리는 결국 진흙 구덩이로군요.



                                             으젠이 구역질 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더구나 괴상한 진흙 구덩이지. 마차를 타고 진흙에 더럽혀진 사람들은 신사이며, 걸어 다니며 더럽혀진 사람들은 사기꾼들이지. 불행하게도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하나 훔쳐보게. 그러면 자네는 법원 광장에서 구경거리가 될 걸세. 백만 프랑을 훔쳐보게. 그러면 자네는 덕망 있는 사람으로 살롱에서 대우받을 걸세. 자네가 경찰과 법원에 삼천만 프랑을 바치면 만사형통이지. 재미있지 않나? (민음사 66쪽)



보트랭은 발자크의 입이다. ‘인생이라든지, ‘파리라든지 현실인식을 드러내는 대사는 모조리 보트랭의 몫이라는 걸 근거로 들고 싶다한 대사만 더 찾아보자.


인생이란 지금까지 얘기한 그대로야.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민음사 149쪽)



보트랭의 말대로 개인적개별적 삶의 이유는 모조리 성공에 대한 집착 밑에 깔린다파리에서는 본래 인간의 미덕이었던 것들이 죄다 질식하고 기존의 악덕이 대접받는다확실히 이런 보트랭(발자크)의 태도는 그보다 한 세대 전에 활약했던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사회의 무질서로 인해 미덕과 악덕이 혼동되어 있으므로 절제는 조심스러운 죄악으로 간주되며 동포에게 삶을 열어주려 하지 않는 것이 인도적인 행위가 되어버린다 (175쪽)


루소의 문장은 발자크의 이야기에 그대로 적중한다



우리는 인간 사회를 얼마든지 찬미할 수 있으나 그 사회는 결국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겉으로는 상부상조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가능한 모든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정당한 이익이 부당한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능가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그리고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손해는 언제나 봉사보다 실속이 있는 법이다. 그때에는 어떻게 철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가 문제될 뿐이다. 이를 위해 강자는 온갖 힘을 기울이고 약자는 모든 책략을 짜낸다... (인간불평등기원론 루소 174쪽)


그런 의미에서 파리는 윤리가 전복된 공간사회의 무질서 상태다고리오 영감은 그 공간의 분명한 희생자다보트랭은 적자(적응한 자)그 사이에서 으젠이 갈팡질팡하는게 아주 볼만하다.
 
으젠의 선택은 아주 중요하다으젠이 야망보다는 행복을 추구했다면(비앙숑이 책은 개인 내면의 성장소설쓰레기 같은 사회를 이겨낸 작은 영웅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으젠이 보트랭의 손을 잡았다면 일차원적인 타락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으젠은 보트랭의 제안을 뿌리치고 고리오를 끝까지 인간적 신의로 대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파리와의 대결이었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개인적으로 으젠의 이 모호한 마지막 대사가 더러운 세상과 맞서고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그의 다짐이 되길 바랐다그러나 으젠은 출세주의에 찌든 중년 남성이 되어  「인간극」에서 사라진다. (열린연단 발자크 편, 페르낭 노트의 '인간극의 허구인물전기사전' 참고그가 말한 파리와의 대결은 더러운 세상에서 완벽한 적자가 되는 것었다이 결말에 따라 <고리오 영감>과 발자크의 방향이 정해진다발자크는 세상이 더러운 줄을 알았다그러나 그는 더러운 시스템을 뒤엎기보다는 어찌되었건 더러움의 수혜자가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발자크가 온전히 체제와 타협의 길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을까아리송하지만 나는 발자크의 유언에서 실마리를 잡는다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비앙숑비앙숑을 불러다오그가 나를 살릴 거야!'
                                                                         <유언, 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한스 힐터 말글빛냄  340쪽
 
비앙숑은 속물근성이 판치는 파리에서 거의 유일하게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는 인물이다발자크가 마지막까지 그런 인물을 가슴에 두었다면 그 역시도 모든 가치가 성공과 출세로 일원화된 파리에서 인간성 회복의 오솔길을 염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물론 내가 지금까지 적은 것은 모두 개인적인 의혹이다.
 
발자크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상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쉽사리 말할 수 없다발자크는 사실주의 문학의 거두인 이유는 그가 이상이나 당위보다는 현실의 상태에 집중했기 때문이다그가 왕당파였고 당시 기준으로도 보수적이었다본래 당위보다는 현상에 집중하는 사람을 보수적이라고 하지 않나발자크의 보수적인 세계는 정확하다만약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던 사람이 발자크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어디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인간의 허영과 이기심에 대해 닷 한 번 고민해보지 않았을까다만 발자크는 그 정확하게 더러운 세계에 너무도 찌들어서 다음 스텝을 밟지는 않았다다음 스텝이 뭐냐고 바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비전, 즉 당위를 생각하는 것이다. 
 
발자크가 나폴레옹이 이룬 것을 펜으로 이룰 것이라 썼지만 나는 실상은 정반대라고 평하고 싶다독재와 전쟁이 목적이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은 봉건주의의 잔재를 덮고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제시했다그러나 발자크는 시민평등이나 새로운 시대의 비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최소한 <고리오 영감>에서 내가 읽어낸 바로는 그렇다.   「인간극」 시리즈자체가 전복이나 혁명계몽이나 선동보다는 당대의 현실을 그대로 담으려는 관찰자적 자세로 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그러나 발자크의 시도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어느 독재자의 야심보다 더 패기 넘치는 것일지도 모른다한 시대의 모든 인간들을모든 사상들과 모든 욕망들을 그대로 종이에 담겠다는 선언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무한을 담으려는 유한한 존재의 시도가 항상 위대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인정해야겠다 끈질긴 묘사와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인물들을 읽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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