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계 기록 조작에 관하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기록조작이 뭘까요? 단순히 기록을 조작하는 것?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문장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문장에서 담지 못하는 내용이 많습니댜. 기록조작이라는 말이 실제로 사용되는 의미를 보면 사실 기록을 조작한 게 아닌 경우에도 기록조작이라는 말을 할 때가 있죠.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상황을 포함할 수 있는 한 가지 용어를 제안합니다. '부정기록'
말 그대로 부정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기록 자체를 조작한 것도 포함이고(없는 기록을 만들어내거나 안 좋은 기록을 삭제하거나) 이 외에 직접적인 조작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사전의 준비작업을 통해 특정한 수준의 기록을 낼 수 있도록 조작된 환경에서 나온 기록 또한 부정기록으로 봅니다.
대회에서의 부정기록은 규정으로 명시되어 있고 이에 대한 처벌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큐브 자체가 맞춰지지 않은 상태에 대한 벌칙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생기는 페널티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집에서 재는 기록들에 대해 이 규정을 모두 충족하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러면 부정하지 않은 것이 뭐냐를 따져야 하는데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지만 저는 부정하지 않은 기록의 핵심을 3가지로 봅니다.
1. 랜덤 하게 세팅된 상황
2. 15초 이내의 미리보기
3. 솔빙이 완료된 상태에서 타이머를 멈춰 얻은 기록
1번부터 볼까요.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데 우리가 큐브 기록을 잴 때 대원칙이 뭡니까? 섞인 상태가 랜덤 하게 결정되고 미리보기 전까지 큐브가 어떻게 섞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섞인 상태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이미 공정한 경쟁이 아닌 것이죠.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미리보기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WCA 규정에 선수들끼리 스크에 대한 대화를 금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겁니다. 이런 점에서 '원래 기록보다 훨씬 좋은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 확인된 좋은 스크'나 '솔루션이 공개된 스크', '내가 이전에 맞춰본 것과 동일한 스크'를 이용해서 잰 기록이 정당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스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미리보기 전부터 알 수 있잖아요.
2번은 뭐 당연한 겁니다. 그냥 규정대로 하자는 거죠. 미리보기 15초가 넘어가면 +2 하고 17초 넘으면 DNF 하고. 이 또한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15초라는 미리보기를 넘겨서 미리보기를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조치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3번도 당연하긴 한데 대신 WCA 규정보다는 조금 여유롭게 적용할 겁니다. 스택 아니면 싹 다 부정기록!이라고 했다가는 날아가는 기록이 수백수천만 개는 될 건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큐브가 다 맞춰진 상태에서 추가적인 조작이 없다면 어쨌든 큐브가 다 맞춰져 있는 상태인 건 사실이니 기록이라고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죠.
집에서 재는 기록이라면 그 큐브가 스마트큐브이든 찍힌 곳이 있든 투명큐브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런 것까지 규정을 따질 수는 없어요. 대회에서야 매우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런 것이 솔빙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실제로 필로우 형태의 큐브나 스티커리스 큐브들의 경우는 규정 변경을 통해 대회 사용 가능으로 바뀌었죠. 아마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의미한 수준이라는 판단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예 기록이 잘 나오도록 조작된 환경에서 기록을 재거나 기록을 잰 뒤 별도의 조작을 거치는 경우 그렇게 나온 기록은 아무리 그냥 집에서 잰 기록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가 어렵겠죠.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나온 기록이 아니니까요.
본인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몰랐다고 해서 옳지 않았던 게 옳게 되는 게 아닙니다. 아예 조작된 상황이라는 것 자체를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상황이 조작된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행위가 잘못된 행위인 걸 몰랐다고 해서 잘못한 게 잘한 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그 사실을 언급하는 것 가지고 기분 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아닌 게 아닌 것이고 그것을 알려줬을 뿐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