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미국 모르지요?

by 최미옥

다니던 대기업을 호기롭게 때려치우고 들어앉아 육아에 몰두하던 딸이 공시생이 되었노라 선언했다. 새벽에 인터넷강의를 듣고는 아이를 챙겨 어린이집에 보낸 후 도서관으로 가고, 하원 시간에 맞추어 허겁지겁 데려온단다. 그런가 보다 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도서관 문 열 때부터 문 닫을 때까지 공부만 하는 것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생각하면 너무 답답해.”

주말에 놀러 온 딸이 이런저런 수다 끝에 눈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서너 차례 쓴잔을 들이킨 후였다. 애써 누르고 있던 울음보가 터져버린 듯 꺽꺽거리며 코를 팽팽 풀어대는 딸을 보고 있자니 애간장이 탔다. 그땐 나도 건강이 안 좋아서 일을 쉬던 터였지만 덥석 손자의 하원을 맡기로 했다.

한 시간 반은 잡아야 하는 거리였다. 가는 길에 진이 빠졌다. 그런데다 다섯 살 수다쟁이는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눈길 닿는 것마다 궁금증이 폭죽처럼 터졌다. 먼 출근(?)길에 이미 지친 나는 왕성한 호기심과 끝없는 질문이 버거웠다. 그래서 머리를 짜낸 게 모르쇠 작전이었다.

할머니 저건 뭐예요? 글쎄 모르겠네. 이건 뭐예요? 몰르, 이따가 아빠나 엄마나 먼저 오는 사람에게 물어봐라잉, 어물쩡 발을 뺐다. 어설피 대답 했다가는 손자의 수다 폭탄에 만신창이가 될 판이었다.

시종일관 모르쇠 하니 수다가 고픈 아이는 어법을 바꾸었다. 질문자에서 설명자로.

“할머니 이거 모르죠? 저거 모르죠?”

“이건요 재잘재잘... 저건요, 종알종알...”

나는 추임새만 넣어주면 된다. 아 그래 그렇구나 신기하네, 비교적 쉽다.

한번은 혼자 동화책을 뒤적거리던 녀석이 구르듯이 뛰어와 나를 앉혔다.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엉거주춤 손자와 눈을 맞춘다.

“할머니, 미국 모르지요?”

수다가 시작될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요.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요만하거든요.”

녀석은 제 엄지손가락을 할미 코앞에 갖다 대며 말을 잇는다.

“미국은요 이따만 해요.”

벌떡 일어서더니 까치발을 한 채 팔을 위로 치켜들어 동그라미를 크게 그린다. 열린 귓구녕으로 주워들은 앎이 넘쳐 주체 못 하는 꼬맹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할미가 답답해 죽을 판이다.

쓰다 보니 손자와 보낸 시간들이 마냥 힘들기만 했던 것 같다. 천만의 말씀이다. 긴 여정에 시달려서 몸은 처지면서도 어린이집이 가까워질수록 콧노래가 나왔다.

콩콩콩 아이가 목청껏 나를 부르며 뛰어나온다. 힘 조절을 못하고 와락 안기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도 해가며 어린이집을 나서는 길은, 하루의 절정이었다. 무슨 말로 그 느낌을 표현하랴. 그 순간만큼은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내가 전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작은 생명. 녀석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꼭 잡으면 그냥 절정이다 싶었다.

딸은 제 아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메뉴얼을 반복했다. 데리고 올 땐 편의점에서 뭘 하나씩 사줘라, 초콜릿과 사탕은 안 된다, 놀이터에서 조금 더 놀려도 되고 싫다고 하면 그냥 들어가라, 들어가자마자 손을 깨끗이 씻기고 간식을 조금 줘라, 배부르게 주면 저녁을 안 먹으니 조금만 줘야 한다.... 마치 한 번도 어린아이를 만져본 적이 없는 이웃 할머니에게 당부하듯 시시콜콜. 근심이 넘친다 싶으면 내가 자네를 키웠소만, 한마디 한다. 딸은 깜빡 잊었다는 듯 시원스런 기럭지를 앞뒤로 흔들며 웃는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데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세상도 덩달아 빛이 났다. 모성은 젊으나 늙으나 사뭇 동물적이고 따라서 얼마간 무대뽀이다. 비약하자면 무대뽀의 모성이야말로 세상을 받쳐주는 혹은 이어가는 근간이 아닐까 싶다.

할미와의 답답한 시간을 잘 견딘 손자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어려움을 호소하던 딸도 이젠 워킹맘의 내공이 쌓여서 친정엄마 찬스는 쓰지 않는다. 세상에서 나 혼자 할머니라는 빛나는 관을 쓴 듯 우쭐했던 적이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는 미국도 모르던’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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