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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찬 Jun 02. 2023

그럼에도 심판은 사람이 해야 한다.

존중하지 않는 야구계 시리즈 5- 로봇 심판과 인간 심판의 사이에서

최근 들어 야구의 인기는 하락했다. 팬들은 야구에 지쳐 떠나간다. 야구팬들이 야구에 실망을 느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는 선수들의 불성실한 태도, 급격히 저하된 수준, 그리고 심판의 오심과 권의 의식이 가장 돋보인다. 심판의 오심에서 비롯된 로봇 심판 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고 이번 고교야구 메이저 대회 <황금사자기>에서는 로봇 심판이 도입되었다. 야구 관계자들은 로봇 심판이 훨씬 낫다고 이야기하지만, 나의 생각은 정 반대라는 걸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마 <존중하지 않는 야구계 시리즈>라는 타이틀에 가장 걸맞은 내용일지도 모른다. 


로봇 심판 설이 나오게 된 계기는 심판들의 오심과 그에 따른 권의 의식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심판은 모두 야구인들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야구계 심판들은 나이가 조금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말하면 프로야구팀의 선수들은 심판의 후배들이다. 그래서인 걸까. 선수들은 볼판정에 대해 항의를 할 때도 "이거 들어왔어요?", "조금 낮지 않았어요?" 등등 존대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억양은 각각 다르지만). 사실 선후배를 불문하고 이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프로야구도 엄연한 직장이며 선수와 심판은 비즈니스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판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5/20에 열린 LG와 한화의 맞대결에서 나온 장면이 그랬다. LG 외야수 박해민과 권영철 주심의 설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가장 큰 요인은 심판의 반말이었다.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라 담지는 않겠으나 보기에 좋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2017년부터 KBO는 심판이 선수나 코치진에게 이야기를 할 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규를 정한 바 있다. 


심판들도 사람인만큼 공 몇 개 정도는 실수를 할 수 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심에 대한 항의는 좀 다르다. 실수는 말 그대로 고의가 아닌 사소한 일이다. 다음에는 같은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채 자기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데 된다. 선수와 심판이 가장 많이 충돌하는 부분은 볼판정이다. 심판마다 존이 다르며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선수들은 성적이 연봉으로 직결된다. 다시 말해 생계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볼판정 하나하나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 항의를 통해 아쉬움을 표출하는데, 문제는 심판들이 복기하지 않는 점에 있다. 아마 느끼고는 있을 것이라 본다. 오심에 관해 야구계가 얼마나 시끄러운지를 말이다. 심판들은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높이와 너비를 확인하고 경기 때 신중을 가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볼판정에 대한 항의를 묵살한다든가, 언쟁을 벌이기도 하며, 과하다 생각되면 퇴장을 시키기도 한다. 사실 항의에 도가 지나치다면 퇴장은 시킬 수 있지만, 5/23에 벌어진 황대인의 퇴장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저 경기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어필하려는 심판의 권의 의식을 내세운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해결법은 간단하다. 우선 오심은 계속 나온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서로의 역할을 인지한 채 이야기를 나누면 갈등은 많이 줄어들 게 분명하다. 심판은 경기를 진행하지만, 그라운드서는 보이지 않아야 할 존재다. 경기의 주인공이 아니란 것이다. 팬들은 선수를 보러 오지, 심판을 보러 오지는 않는다. 반대로 선수는 경기를 뛰는 사람이다. 플레이를 팬들에게 보여주며 가슴에 불을 지펴야 한다. 이에 대한 사례가 있다. 2022년 9/30에 열린 kT와 KIA의 경기에선 문승철 주심이 KT 투수 데스파이네가 던진 공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한 실수 후 자신의 볼판정에 대해 사과를 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드물게도 판정을 번복했는데, 이에 KT 이강철 감독이 어필을 하자 자신이 잘못 봤다 말했다. 자연스레 서로 웃으며 상황이 마무리되었고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판정 번복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였다. 심판도 사람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는 건 야구장에 있는 모두가 안다. 그 실수를 본인이 인정하지 않고 '선배라서', '심판은 경기를 주도할 수 있어서'라는 등의 이유를 갖다 대 언쟁을 벌였을 때야 비로소 문제가 되는 거다. '오죽하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심판이 공정한 심판이다.'라는 말이 나올까. 심판과 선수들(코치진)은 서로의 역할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모습이 보일 때야 오심에 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오심과 함께 다가오는 건 공정성이다. 이에 <황금사자기>부터 로봇 심판이 도입되었는데,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자리 잡는 데는 성공했다. 공정하고, 또 공정하기에 판정에 대한 항의가 나오지 않는다. 구심의 귀에 꽂힌 이어폰으로 볼/스트라이크 여부를 알리고 구심이 판단하는 시스템인데, 이게 너무나 정확해서 꺼려졌다. 로봇 심판의 장점은 일관성이다. 기계가 망가지지 않는 한 판정 범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인간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다.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경기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 일부러 지고 있는 쪽에 유리하게 볼판정을 내린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줄어들긴 하지만, 대부분은 선수 보호차원에서 그런다. 어린 선수들은 신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았기에 공을 많이 던지면 좋지 않을뿐더러 정신적인 면도 고려를 하는 인간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봇 심판은 그러지 않는다. 일관성 있게 판정하는 나머지 말 그대로 '기계적'이다. 공정성의 측면에서는 할 말이 없다. 여기서부터는 선수들의 적응에 관한 비관론이다. 어린 선수들은 평소에 스트라이크로 판정되던 공이 볼로 선언이 되면 평정심을 잃는다. 이는 곧 자신감 저하로 이어지고 성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자연스레 수준은 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번 <황금사자기>에서는 한 경기에서 사사구가 30개 이상 나오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야구의 본질은 인간이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그중에서 야구는 공을 매개체 삼은 인간이 주체가 된다. 공을 던지고 치고받으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야구는 공을 던지기 위해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고(배터리), 뜬 공을 누가 잡을지에 대해 인간과 인간이 소통한다(콜플레이), 그리고 인간이 하는 스포츠기에 실수(실책)가 나오고 시련(슬럼프)을 견뎌내는 인간을 보며 인간(관중)이 환호한다. 게다가 야구는 희생을 거룩하게 여겨 기록(희생타)해 주는 유일한 스포츠다. 희생은 우리가 팀이라는 공동체 정신이 깃들어 있는 단어다. 인생을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표현하고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심지어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르다. 이런 예측불가능한 스포츠인 야구를 즐기려면 인간이 필요하다. 인간이 주체인 스포츠인 야구 경기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진행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지 묻고 싶다. 뭔가 괴리감이 느껴질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계속해서 말하는 오심에 대한 공정성은 인간이기에 나아질 여지가 있다. 인간이 주체인 스포츠를 기계가 진행한다면 공정하고 일관성 있다는 평가가 뒤따를 것이다. 그런데, 공정과 일관성이라는 두 단어가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우리에게 박진감을 주는 건 사람의 모습이다. 기계에게 명령(볼판정)을 받고 움직이는 건 꼭두각시로만 보일뿐이다. 


종목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경기의 내용이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말하듯 사람이 하기 때문에 경기에 몰입하게 된다. 몰입한 나머지 선수가 실수를 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극심한 연패에 빠진 팀을 구해내는 에이스의 모습에 웃음을 짓기도 한다. 스포츠가 가진 힘은 이처럼 사람을 통해 사람을 모으는 것이다. 야구라고 다를까. 그래서 우리는 야구장을 찾는다.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라는 KBO의 캐치프라이스와도 궤를 같이 한다. 어린이들은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 한 선수에게 사인을 받고 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이가 있는 한편, 어느 순간 몇몇 프로 선수들의 영향을 받아 글러브와 헬멧을 패대기치는 어린 선수들도 많아졌다는 것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문제다. 이제는 시스템을 바꿀 때가 됐다. 그 시작은 서로 존중할 줄 아는 것이다. 이상적인 이야기긴 해도 선수와 주심이 볼판정으로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서로의 실수를 인정한다면 로봇 심판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이 하기에 재밌는 야구에 사람이 아닌 존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심판은 사람이 해야 한다. 물론 관습이 바뀌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심판들은 더 이상 권위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같은 야구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경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란 걸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야구 규칙에 따르면, '타구가 심판을 맞고 굴절되어도 볼데드로 간주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심판은 경기장에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는 뜻이며 경기장 안에서 심판의 역할은 판정밖에 없다. 그런 심판의 역할이 판정뿐만이 아니게 된다면 야구의 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심판은 그라운드에서는 없는 존재지만, 꼭 필요한 존재다. 그렇기에 더더욱 로봇이 대체할 수 없다. 만약 한국 야구가 이 위기를 딛고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 발짝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먼 빈센트 필이란 저술가의 말에다 야구계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야구인들(심판 포함)을 대입해 보면 야구계가 어떻게 바뀌어 나가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이 주체인 스포츠는 인간 이외의 존재가 대체할 수 없다. 


무언가 달라지길 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 노먼 빈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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