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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ul 06. 2022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줄게요

어떤 우정의 기록  -  '같은 마음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작년 겨울, 고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 편지를 받았다. 원고지에 볼펜으로 적은 편지였다.

읽고 나서 오랫동안,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에도 아이와 나의 시간이 생각났고, 이렇게 삶과 생각과 마음을 글로 실어 나를 줄 아는 아이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졌다. 아이의 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으며 적어본다.


  언젠가 딸아이들이 해맑게 노는 걸 보며 문득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내게 사랑을 원할 때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었던 적이 있을까? 하고.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날이 더 중요하다.


나의 마음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일, 그리고 당신의 사소함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주려는 일이 관계의 시작과 출발의 마음이기를 다시 다짐해본다. '당신의 검정 자켓을 기억했던 일'이 불러온 4년의 시간과 마음처럼 말이다.


나는 아이에게 다시 긴 답장을 쓰고 있다. 그 답장의 어딘가에 이런 문장을 꼭 담아두고 싶다.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줄게요.'


학생의 편지

  12月22日오후 8시경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던 사람들에 관하여


      중학교 2학년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늘 철원 선생님을 마주쳤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인사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선생님께서도 늘 지나치는 날 불러 세우신 적은 없었다. 이제야 알았지만, 선생님께서는 내가 중학교를 다녔을 적 나의 상태와 그날 입은 옷, 표정에 대해 적어두셨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날 신경 써 주신다는 사실을 그때도 어렴풋이나마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선생님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이 닥칠까 봐.

  그래서 선생님 곁을 지나갈 때면 답지도 않게 속도를 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의 무기력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으셨다.


  다만, 웃고 있을 때면 오늘은 표정이 좋아 보여 다행이라는 말씀만을 전해주셨을 뿐이다. 가끔은 이런 함구에 감사하다. 저번 시 창작 시간, 선생님께서 모두에게 시집을 선물해주셨다. 내게 주셨던 시집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집 첫 페이지에 남겨 주신 글은 지금까지도 자주

생각난다.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라는 선생님의 글은 4년으로 맺어져 있는 선생님과 나의 시간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선생님께 느껴지는, 그리고 선생님께 받는 마음들은 이런 거다. 가끔은 일이다 사랑이다 치여 살아도 맞닿으면 온기일 수 있다는 것, 나 대신 헤진 자켓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어 사는 게 꽤 괜찮다는 것, 이런 것들을 선생님은 끊임없이 가르쳐 주신다. 고열에도 손잡으면 따뜻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선생님 덕분에 몸소 깨닫는다. 내가 피하면 상황도 피해질 거라고 굳게 믿던 어린 날의 여름에 사랑한단 말없이도 사랑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참 다행이다.

언제나 엇갈리지 않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지난 시 창작 시간에 이런 글을 적었어요. 지금까지의 모든 수업을 통틀어 진짜 저의 글을 적었고, 그 때문인지 완성시키는 데에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올해 시 창작 시간은 매번 눈으로만 전해 주셨던 선생님의 시간을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던 감사한 수업이었어요. 같은 마음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삶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 전 이런 것들을 배웠어요. 언젠가 //가 선생님과 대화하는 시간은 심리치료와도 같았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그 뜻을 알 것 같아요.      


  시 창작 수업 마지막 시간, //이가 수업에 있어 너무 방어적인 태도를 모인 것 같다고 글에 적어줬었는데, 저 역시도 늘 경계했고 긴장하며 참여했었기에 크게 고개 끄덕이게 됐어요. 그래도 선생님 덕분에 날 선 마음으로 사는 것도 관뒀어요. 이렇게 버겁고 무해한 사람은 다신 없을 것 같다고 무의식 중에도 늘 생각해요.


  선생님 제게 부를 수 있는 세상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해요. 외눈박이로 살던 제 안쓰러운 삶 두 눈 트이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실은 꼭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태양을 등지고 설 때면 한낮 없는 세계에 목마름이 일었다고, 언제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선생님이 알아주시길 바랐어요.

  날이 추워요, 자켓보다는 패딩 입어요, 저희. 이제야 답장드려서 죄송해요.그리고 저 선생님이 고3 학년 대표 맡아주시는 것 진짜로 좋아요.                                                                                                       -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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