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파이 Mar 21. 2024

단골손님과 취업한 따님

시간의 내공

오래된 단골손님이 호두파이 10판을 주문하셨다.

큰 딸이 이번에 취업해서 첫 월급을 받았단다. 주변 분들과 기념으로 식사를 할 건데 그때 호두파이를 선물로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그 아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주문해 주셨다. 그땐 김영란 법이 생기기 전이라 학교나 학원에 선생님들 간식으로 자주 주문 주셨다. 그때 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까지 성공하다니 시간이 어느새 그만큼이나 흘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걱정하시던 모습도 어렴풋이 스치는데 벌써 사회에 나가 제 몫을 해낸다고 생각하니 손님 딸이지만 무척 기특하다.


파이집을 10년 정도 하다 보니 단골손님이 많다. 집안 대소사가 생길 때마다 파이집을 찾아 주는 손님들이 있다. 믿고 주문할 수 있는 파이집이 있어 선물 고민을 하지 않는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웃으며 짐짓 점잖게 감사를 표하지만 속마음은 덥석 손을 붙잡고 격하게 고마움과 감동을 내보이고 싶다.


처음 파이집을 시작할 때는 우리 아이들도 어렸고 준비금도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아파트 상가 뒤켠에 자리를 잡았다.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유지가 되어야 할 텐데 싶어 내심 걱정이 됐었다.

인테리어 해주던 사장님도 이 위치에 포장만 해가는 디저트집이 되겠냐고 혀를 끌끌 차셨다. 그렇지만 집에서 호두파이를 구워 팔며 생긴 내 단골들을 믿고 시작했고 어느새 10년 차가 됐다.


꼬맹이였던 동네 아이들이 10년 새 성인이 되어 웃으며 찾아올 때면 무척 반가우면서도 마치 시장통 원조 할머니 국밥집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지고 내 나이에 현타가 온다.  남의 집 아이들 크는 속도는 체감이 더 크게 오는 법이다.


"아유~ 엄마한테 초코타르트 사달라고 조르던 어린이가 언제 이렇게 컸어!! 이제 제 돈으로 먹고 싶은 파이를 다 고를 수 있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하루 8시간씩, 한 달 25일만 일했다고 쳐도 10년이면 2만 시간이 훌쩍 넘게 쌓였다.


기술적인 전문성뿐만 아니라 손님들과의 믿음도 쌓인다. 여러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 유능함, 능숙함도 쌓인다.

진상 손님 요구에 당황하지 않고 유려하고 유창하게 방어할 수 있는 말빨도 쌓인다.


"제가 이 자리에서 10년째 파이 굽고 있어요."


처음 온 손님이 못 미더운 눈빛으로 여기 파이 맛있냐고 물어볼 때 해주는 말이다.

장사 초기에는 어떤 재료를 쓰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했다.

이제는 10년 차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설명을 대체한다. 그만 시간을 쌓아 왔다는 건 파이 맛을 믿고 찾아주는 손님들도 그만큼 존재한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내공이 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여도 끝이 창대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힘이 모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노련함이 시간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비단 장사에만 적용되는 역학 관계는 아닐 것이다. 무엇이든 꾸준함을 갖춘다면 비록 처음엔 아무도 몰라 줄지라도 시간의 내공으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스스로는 부족하다 느낄지라도 주변에서 그 시간을 인정해 준다.


20대 때는 조바심이 났다. 내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한 분야에만 매진했다가 나의 재능 없음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쪽저쪽에 발을 찔끔 담가봤다가 내 능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도망쳐버렸다. 그러곤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그 조직의 문제점을 떠벌리거나 미래가 없어서 그만뒀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재능을 이기는 게 시간의 내공이었다. 그걸 20대, 30대를 지나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손님의 딸 같은 사회초년생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할지 안다. 취업을 했든 못했든 마찬가지다. 재능이 있으면 땡큐고 없더라도 상관없다. 내 시간을 쏟은 곳에서 내 전문성이 생길 것이다.


그나저나 손님의 딸은 좋은 곳에 취업한 것 같았는데 어디 취업했냐 물어보면 실례일까 싶어 질문을 아꼈더니 너무 궁금하다. 조만간 부서에 돌릴 간식도 주문다고 하셨는데 그땐 여쭤봐야겠다. 자식 자랑은 판을 깔아줘야 신나게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간과했다. 아직도 내공이 부족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