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여름 어느 날, 엄마와 아이가 산책을 나왔다. 파릇파릇하게 생기가 넘치는 초목들이 자연의 싱그러움을 더해주며 이들을 맞이한다. 한참 자연 속 풍경을 즐기며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그 때 멀리서 경적 소리가 울린다. 기차 한 대가 초목들을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2층 높이의 기차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막 파리에서 이곳 아르장퇴유로 도시 사람들을 싣고 오는 중이었다. 엄마와 아이 또한 저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이곳을 왔을 것이다. 그리고 전경에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2층에 올라탄 사람들처럼 휴일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기차가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다시 울창한 초목들 속으로 숨는다. 싱그러운 여름, 아르장퇴유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1872년 모네는 아르장퇴유 인근에서 기차와 뱃놀이, 다리를 주제로 하는 일련의 그림을 그린다. 특히 1872년부터 1874년까지 다리와 기차, 배는 모네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들이었다. <시골의 기차>는 모네가 기차를 소재로 그린 작품들 중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데 몇 가지 형식적인 증거가 이를 말해준다. 우선 초목에 비치는 반사광의 표현, 비교적 어두운 색조, 인물을 흐릿하게 나타낸 것에서 바르비종 화파나 초기 플렝에르 화파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 있다. 또한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산란하는 빛의 표현이나 과감한 색채 사용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시골의 기차>는 전형적인 모네풍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어려운 회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주제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산업 구조물을 대하는 모네의 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네가 교외 지역의 모순을 자신의 회화 경향에 접목해 수수께끼같은 회화를 창조해 냈다면 모네는 교외 지역의 모습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관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마네가 인물화에 방점이 찍혀 있던 사람인 반면 모네가 풍경화를 주력으로 삼는 화가였다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전에도 언급했듯 19세기 미술에 있어 풍경화의 덕목이란 인간의 활동이 가급적 드러나지 않는 순수 자연의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모네가 활동했던 시기 이러한 명제는 바르비종파로 대표할 수 있는 일군의 풍경화단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바르비종파 이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모네 역시 자신들의 동료들과 함께 당시 프랑스 풍경화의 덕목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바르비종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없는 풍경을 그린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머나먼 오지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상주의자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한 1860-1870년대는 아직까지 교통 수단이 미지의 자연 세계로까지 뻗어있지 못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들은 후기 인상주의자들이나 20세기 초 전위적 화가들처럼 남태평양의 타히티나 남프랑스의 어느 시골, 아프리카와 같은 '원시'적 자연을 찾아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놓인 과제란 인간과 자연을 어떠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관객들에게 설득력있게 제시하느냐의 문제가 남게 된다. 문제의 해결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풍경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르카디아와 같은 고전적 유토피아는 이러한 사고방식 하에서 19세기에도 그 생명력을 얻었다. 다음으로 인간과 자연을 최대한 조화롭게 묘사하는 방법이 있었다.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소설가 보들레르가 일찍이 주장한 현대성이라는 주제를 이와 연결시켜 교외에서의 풍경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모네의 작품은 그러한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초목과 기차의 수평성과 나무의 수직성이다. 모네는 이미 60년대부터 대상들을 수직과 수평으로 배치함으로서 그림이 가지는 메세지를 형식적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방법을 사용했었다. 여기서 그러한 형식적 방식은 기차와 초목의 수평성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그림에서 기차가 유발할 수 있는 소음이나 매연으로 인한 대기의 오염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은 지난날 선로의 개통으로 인한 지역민들과 도시민들의 갈등, 각종 환경오염 등을 애써 무시하려는듯 보인다.
모네는 기차와 같은 근대적 요소들을 회화에 주기적으로 등장시킴으로서 이러한 소재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1873년 그린 <아르장퇴유의 철교> 또한 이를 보여주는 예이다. 그림 속에서는 전형적인 아르장퇴유의 풍경이 보인다. 한가롭게 떠 있는 배들의 모습과 산책로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들 그리고 철교라는 요소는 모네가 아르장퇴유를 그릴 때 자주 등장시키는 소재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이 그림은 모네가 보여주고자 했는 자연에 대한 즉각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수 많은 회화 중 하나에 불과해 보인다. 물결에 표현된 반사광들과 계절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된 빛, 그림자의 표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의 독특한 측면은 기차가 내뿜는 연기가 유난히도 낮은 고도에 그려진 구름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특히나 연기가 상공에서 흩어지는 것을 묘사한 방식은 바로 왼편에 있는 구름을 복사해서 그렸다고 할 정도로 비슷하다. 물론 이런 묘사는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역사에서 생시몽주의자들이 공장의 연기를 하늘의 구름에 빗대어 찬양했던 사례가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표현 방식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한편 기차를 그린 일련의 그림들 중 특정 위치에서 기차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린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 그림들은 모네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변 너머의 둑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냐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찰을 충실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림은 강가와 기차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림은 아르장퇴유가 감추고 싶어했던 문제를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있다. 해당 그림은 오랫동안 독특한 구도로 인해 주목을 받았던 그림이다. 전경의 거의 1/3 이상이 둑에 가로막혀 시야가 제한되어 있고 초목들의 존재로 인해 반대편의 풍경이 사실상 가려져 있다. 저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당시의 문헌들을 토대로 19세기 아르장퇴유에 있었던 부두가 모네가 가려놓은 반대편 둑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부두는 관광객들 실어 나르는 용도가 아니라 노르망디에서부터 온 산업 자재들을 실어 나르는 일종의 산업용 부두라는 것을 밝혀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모네가 단 한번도 아르장퇴유의 산업 풍경을 가까이서 묘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집이 철강 공장과 꽤 가까웠고 그가 자주 사생하러 가던 장소 근처에 산업용 부두가 존재했음에도 그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는듯 화폭에 담지 않았다.
이렇듯 모네 회화에서 나타나는 의도적인 배제의 양상에는 한 가지 비정한 진실이 존재한다. 독립전을 개최하고 살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상황에서 모네와 같은 화가들에게 놓인 문제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이 처음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다름 아닌 합자회사라는 명칭을 쓴 것은 이 집단의 성격이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 이들이 첫 전시에서 많은 비평가들의 호응을 얻었음에도 낙담했던 이유는 경매 시장에서 작품이 원하는만큼 팔리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새로운 판매처를 개척하기 위한 화가들의 노력은 그들의 잠재적 고객들의 취향에 부응하는 회화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인상주의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줄수 있는 계층은 당연히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따라서 인상주의자들에게 교외는 노동자들의 일터가 아니라 부르주아들의 유희의 장소로서 그려져야 했다. 만약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묘사하기 위해 그 옛날 쿠르베가 <돌깨는 사람들>들을 묘사할 때 그러하였듯 비정한 노동 현실을 담으려 한다면 독립전은 자금의 부족으로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왜 많은 인상주의자들이 당시 프랑스의 경제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산업적 풍경을 그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제공해준다. 물론 모든 인상주의자들이 산업적 풍경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후일 살펴보게될 피사로나 기요맹 같은 인물은 분명 노동자를 강하게 염두해 둔 산업적 풍경들을 묘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인상주의자하면 떠오르는 모네나 르느와르 같은 인물들은 산업 풍경을 묘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화가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화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슬픈 진실을 목도한다. 조화라는 이름 하에 등장했던 교외 풍경화는 실상 조화라기 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무시함으로서 얻어지는 무엇에 불과했다. 그리고 더욱더 슬픈 것은 그러한 이름 하에 그려진 회화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그 이면에 있는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모네의 회화는 그가 추구했던 것처럼 빛으로 넘쳐나는 회화지만, 진실의 일면이 감춰진 반쪽짜리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