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조금 비워내도 - 3화

열정의 대가로 치러야 했던 상처

by 엣지있는 김작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
사랑이라 믿었던 결혼,
그리고 자폐 아들과 함께한 긴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찾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쓰는 건, 살아내는 일과 같다. -엣지있는 김작가-


열정적인 대학 시절을 마치고 방송극작과를 졸업한 나

는, 운이 좋게도 그때 한창 ‘핫’하던 m.net 방송국에 작

가로 취직하게 됐다.


한 회 방송이 나가면 고작 15만 원.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열정페이였지만,

그땐 그저 작가라는 이름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SBS ‘웃찾사’에서 프리뷰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소개를 해준 자리였다. 담당 작가가 갑자기 그만두면서

급하게 들어간 케이스였다. 면접을 본 그날, 바로 출근

해야 했다.


그 프로그램은 국민 아이돌 HOT의 문희준 일상을 그

리는 리얼 다큐였다. 중학교 시절 그를 좋아하지 않으

면 이상할 정도로 전국이 들썩였던 전설의 연예인이 주인공인

그런 프로그램에 내가 들어가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첫 출근 날,

집 앞에 서있는 팬들 사이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안녕하세요, 김작가님.”

그의 첫 인사에 심장이 요동쳤다.


이런 걸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하나.

그때 나는 정말로 꿈을 이룬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막내 작가에게 주어진 건 꿈이 아니라, 눈치와 압박이

었다. 메인 작가는 얼굴조차 보기 어려웠고, PD들은 잿

밥에만 관심이 있었다.


대본도, 지시도 없이 하루하루 버티는 게 일이었다.

메인 PD는 처음엔 친절했지만, 지방 촬영을 가면서부

터 그의 관심은 일보다 나에게 쏠려 있었다.


락페스티벌 촬영을 마친 뒤 회식 자리에서

내가 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날 이후부터 그는 나를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대본은 왜 안 받았어?”,

“메인작가한테 직접 연락해 봐.”


매일같이 늦게까지 아이디어 회의를 강요했고,

집이 멀다는 이유로까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 위경련이 올 정도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메인작가를 찾아가 사정을 털어

놨다. 그는 “내가 해결해줄게, 걱정 마.”라고 했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 메인작가는 당시 방송계에서 손꼽히는 구성작가 중

한 명이었다. 이혼남이었고, 다정한 말투 뒤에 숨겨진

의도를 그때는 아직 몰랐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그날 밤.

언니네 집이 있던 화성에서 청담동으로 출퇴근하던 나

는 늦은 시간, 메인작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의논할 게 있으니 홍대로 올래?”


대본 이야기인 줄 알고,

언니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뒤

콜택시를 불러 홍대로 향했다.


그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오늘 회식이 있었거든. 술이 안 깨서 그런데 노래 한 곡만 하고 가자.”


싫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땐 어려서 ‘거절’보다 ‘참는 법’을 먼저 배웠던 시절이었다.


프로그램이 종영되기 전이었고,

이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노래방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내가 노래를 부르자 그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와 앉았다.

그제야 이상함이 느껴졌다.


“선배님,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따라 나왔고,

밖에서 다시 작업실로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함께 택시에 올랐다.


그는 택시 안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놨다.

“나 개그콘서트에서 제안 받았어. 너 같은 신입 하나 키

우는 건 일도 아냐.”


그의 말은 술 냄새와 함께 역겨웠다.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식탁 위에 남은 스팸 통조림과 소주병을 꺼내왔다.


“일 힘들지?”


나는 그 말 뒤에 이어질 기류를 느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문나면 끝이다. 경찰을 불러도, 소리쳐도,

결국 나만 손해일 거야. 침착하게 행동하자.’


그리고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침대가 있는 방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내가 너하나는 잘 키워줄 수 있어.”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선배님,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아요.

내일이면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


그리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었다.

그는 문 앞까지 쫓아와 말했다.


“너 후회한다, 진짜.”


나는 꾸벅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말미잘 같은 인간이 감히 날 뭘로 보고..’


이후,

나는 방송국 일을 바로 그만두고 싶었지만

마지막까지는 잘 마무리 하고 끝내고 싶었다.


다행히 메인작가는 마지막 쫑파티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난 프로그램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었다.


꿈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보다 더 커진 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