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둘러맨 채 밤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나지막한 언덕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던 사내가 내 앞에 멈춰 섰다.
- 여긴 어쩐 일이야?
사내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엇? 안녕하세요! 회사에서 회식이 이제 끝나서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
- 이 시간에?
그러면서 그는 손목시계를 흘깃 봤다.
- 아홉 시 반인데?
- 네. 그러니까요. 늦었네요.
그는 코로나19로 난리인 이 시국에 회사에서 회식을 했다는 게 이상한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럼 가 보겠습니다, 했다.
우린 서로 악수를 했다. 그는 내가 종종 나가는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잘 꾸며진 레스토랑이 보였다. 밤이었지만 떠들썩한 분위기였고 따뜻하고 아늑한 조명들이 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인 이 시국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되는 건가,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그곳을 지나치려는 찰나, 자세히 살펴보니 결혼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과 신부가 러브샷으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 광경을 뒤로한 채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1호선 급행열차가 들어왔는데, 열차가 이상했다. 셔터가 3분의 2 정도 내려간 상태여서 사람들은 골룸처럼 등을 굽힌 채 열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도 등을 굽혀볼까, 하는 찰나 셔터는 완전히 내려졌다.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다음 열차를 타는 것 말고는 방법도 없었다.
기다리다 보니 다음 열차가 들어와 무사히 타긴 했으나 뭔가 이상했다. 고등학생 이하 아이들만 타고 있었고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수업을 들었던 지리 선생님이 무대에서 연설을 하고 내려와 내 무릎을 툭 치며 알은체를 했다.
- 넌 몇 학년 몇 반이야?
내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가 그렇게 물어서 난 성인이라고 했더니 도끼눈을 하며 나를 쫓아냈다.
- 성인이라고? 성인은 이 열차에 절대 탈 수 없어!
나는 뻥 차여서 다른 성인들 몇몇과 다음 역에서 쫓겨났다. 함께 내쫓긴 성인들 중 아는 이들이 있었으나 차를 태워준다고 할까 봐 냉큼 혼자 떨어져 걸었다. 길거리를 지나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는데 문득 내게 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구류와 물건이 가득 담긴 종이가방 여러 개. 그것들을 두고 갈 순 없었다.
다시 짐이 있는 곳으로 터덜터덜 올라갔다. 언덕배기 아랫부분에 내 이불과 베개, 여러 개의 종이가방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노숙자의 숙소처럼.
나는 남편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이 정확히 7번 반복될 동안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의 컬러링은 드라마 <아내의 유혹> 주제곡. -꿈이 아니라 실제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 해." 이 구절이 정확히 7번 반복된 이후 반가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 내가 피하려고 했던 지인들이 흰색 승용차를 타고 내 곁을 지나갔다. 운전자는 이제는 다 커 버린 중학교 남자 동창이었고 뒷좌석엔 고등학교 때 나를 가르쳤던 지리 선생님과 역시 중학교 동창이었던 다른 남자아이가 타고 있었다.
나는 현실에선 한 번도 그들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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