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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졍 Sep 08. 2018

에피파니

찰나가 주는 ‘부정적 에피파니’ 순간의 의미에 대하여


찰나가 주는 ‘부정적 에피파니’ 순간의 의미




28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봤던 단어, ‘에피파니’. 대학원 학부 수업 중에 듣게 된 단어다. 어떤 뜻일지 조금도 가늠이 되지 않는 이 생소한 단어를 듣자마자 적응도 하기 전에 이 단어로 과제를 해야 했다. 에피파니를 경험했던 순간에 대한 기록과 그 경험에서 좀 더 살을 붙이고 발전시켜 에세이 형태의 글을 써내야 하는 것. 이 글은 그때 썼던 그 과제를 조금 더 다듬은 것이다.




에피파니:

현현(epiphany)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 속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감각 혹은 통찰을 뜻하는 말. 원래 'epiphany'는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며,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가 현세에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_참고:네이버 지식백과




‘에피파니’라고 하는 이 감정에 대해 가장 가깝게 느꼈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보고 나서 한동안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이슈이기도 했고, 잊으래야 잊히기도 힘들었던, 연극<죽음과 소녀>를 보면서 느낀 그 감정과 보고 난 후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진’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먼저, 내가 봤던 연극<죽음과 소녀>는 실제로 있었던 칠레의 독재정권 시절 성고문 당했던 피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한 공연으로,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희곡을 베이스로 원작의 8장면 중에 3장면만 꼽아 압축해 만들었고,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됐다. 믿고 보는 ‘양손 프로젝트’ 팀의 공연은 70분 동안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세 명의 배우로 공연장을 가득 채워나갔다. 1시간 10분 동안 숨을 죽이며 집중해서 관람했었다.

연극 <죽음과 소녀>는 정치 권력구조에서 발생하는 권력에서 나오는 힘의 양면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보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정치 권력구조에서 가해자들의 서슴없는 폭력에 스러져간 피해자들. 비단 이 연극의 모티브가 된 사건뿐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괴로운 감정이 들기도 했었다. 또 어쩌면 더 잔인무도하게 짓밟히는 인권들이 아직도 많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도.  

[칠레의 독재정권 시절 성고문 당했던 피해 여성에 대한 참고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6235295&sid1=001) ]

아무리 인생이 고된 고난의 길 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절망적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평범하고 소박한 소망이나 희망조차도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릴 수 있는 현실과 본인이 자처해서가 아닌, 의도치 않게 만나는 불행들 앞에 무력한 인간은 도대체 어찌 극복해 나가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답함도 밀려왔었다.

이 극 자체의 밀도와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서 느꼈던 감정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ㅡ수전 손택의 『 사진에 관하여 』 에세이 중 -플라톤의 동굴에서- 에서 등장하는(본문 42p)ㅡ ‘부정적인 에피파니’라는 표현을 차용하여 글을 서술해 나가려고 한다.    

인간은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는다’는 슬프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숙명을 가지고 살아나가며, 이 땅에 던져지는 순간부터 수많은 우연과 필연적인 계기들 속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자연의 시간은 순간순간 계속 흐르고,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서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과 상황들을 만나며 여러 감정들을 느끼면서 살아 나간다. 그러한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희(喜)’라고 하는 좋은 감정도 느끼지만 ‘비(悲)’라고 흔히 말하는 부정적인 심리상태도 느끼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자연재해와 같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 부서지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거나 겪어가면서 인간의 무력함도 동시에 느끼게도 된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빚어지는 사건들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면 반대로 몇몇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의견 충돌 등에 의하여 벌어지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사건들도 겪게 된다. 이러한 필연적 사건들 앞에서 처참히 짓밟혀야 했던 개개인들이 존재해왔다. 아직까지 현재 진행이기도 하고. 겪지 않았어도 됐을 일들을 몇몇의 기득권층의 이익과 자리보전을 위한 다툼 안에서 이런 필연적 계기들로 인해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아픔들을 겪어 왔어야 했다. 이렇게 저렇게 자연에 의해서 혹은 같은 인간에 의해서 (다르게 말해서 우연과 필연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고, 또 이러한 겪음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직접적으로 겪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대중매체 혹은 요즘 활발히 이용되고 있는 온라인 매체를 통해 간접 경험하게 되거나 예술가들이 남겨놓은 예술작품을 통해서 간접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다. 앞서 말했던 감정들 중 특히 부정적인 사건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부정적 에피파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특히 그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 중 특히 ‘사진’이라는 매체에 집중해보았다. ‘사진’은 손에 쥐어질 수 있는 특정 물체로 남겨져 전시되는 특성과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가 담긴 것이므로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사진을 예술작품이라고 간주하고 이야기를 써내려 가보려고 한다.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을 그대로 포착하여 그 순간, 찰나를 프레임으로 담아내는 것이 사진이 가진 유일한 기능이자 특징으로, 이러한 특징에서 다른 예술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을 전달해준다고 볼 수 있다. 또 사진(매체)과 감상자가 만나는 그 순간 감상자의 또 다른 감정적 순간이 쌓이게 되는 또 다른 찰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예술작품 감상 시에도 발생되기는 하겠지만) 특히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에 집중하여 표현하게 되면 다른 매체보다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좀 더 강렬한 ‘찰나의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그림1. 후잉 콩 우트, <전쟁과 공포> 1973


 

그림2.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중



위 두 장의 사진은 잔인하고 참혹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들로,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사진이기도 하다. 위 사진들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대개 비슷할 것 같다. 충격과 공포 혹은 참담함, 증오와 같은 감정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개개인마다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는 순간 이러한 극적인 감정의 순간에 휩싸이게 됨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꼭 누군가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나부터가 이 사진들을 보면서 그러한 감정을 느꼈었다.  


“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때 사진은 충격을 줄 수 있다. 불행히도 이런 도박은 여전히 성행 중인데, 무서운 이미지를 퍼뜨리는 것이 그 방법 중 하나이다. 극도로 공포감을 자아내는 사진을 처음 대면한다는 것은 일종의 계시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기본적으로 지극히 현대적인 계시, 즉 부정적인 에피파니를. 내 경우에는 1945년 7월 산타모니카의 한 서점에서 베르겐-벨젠과 다카우의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 그런 경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진에서나 실제 생활에서나 그토록 날카롭고, 깊고, 빠르게 내 뼛속까지 스며들 만한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내 인생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그 사진을 보기 전(그때 다는 열두 살이었다)과 보고 난 뒤로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사진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완전히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뒤였는데도 말이다. 그 사진을 봐서 내게 어떤 득이 있었을까? 그것은 그저 사진 ㅡ 나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어서 못 본 체할 수도 없었던 한 사건, 의 사진일 뿐이었는데. 그러나 그 사진을 보자마자 뭔가가 무너지는 듯했다. 어떤 한계에 맞닥뜨린 것 같았으나 그것이 꼭 두려움의 한계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상처를 얻었으나 마음 한 구석의 어떤 감정이 죄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군가 죽어 가고 있다, 누군가 아직도 울고 있다…. ”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중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 중 일부 발췌


물론 수전 손택은   다음에는 사진의 충격적 이미지를 본다고 해서 양심이 생기고, 인정을 베푸는 능력이 반드시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이미지도 계속 보면 점점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서술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이미지가 주는 의의는 확실히 있다는 생각 아래 논의와 맞닿아 있는 일부 내용만 발췌하여 공개하고 계속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전혀 시기적으로나 등장인물의 공통점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나열해서 보여주면서  여러 사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이나 주제를 찾아내 표현하기도 하는 것처럼 (예를 들어 옴니버스식 영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에서   단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이끌어 내는 것처럼) 이와 유사하게,  사진들도 시기 상으로나 관계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 등은 찾아볼  없지만  사진을 하나로 관통할  있는 ‘어떠한연관성을 쉽게 찾을  있다. 앞서 말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생성하고 ‘어떠한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그러한 ‘분위기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의 ‘이동 가능성이라는 특징 안에서 다른 무엇보다 이러한 감정의 전이가 쉽고, 쉽고 빠르게 전달되며,   전파력을 지닌다고   있다.  이러한 사진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하나의 역사의 길을 만들어 나가고 사회적인 기능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위에서 언급한 사진들을 통해서 사진의 찰나의 이미지에서 ‘부정적인 에피파니 순간을 느끼고  앞서 말한 ‘사진만의 고유한 특징들 안에서 그런 감정들이 전달되는 가능성의 크기에 대해서   있다.  
 
아도르도의 예술작품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이야기에 힘을 싣고자 한다. 아도로노는 객체에게서 유사성과 차이를 지각하는 경험을 심미적 경험이라고 했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심미적 경험은 심미적 객체,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예술작품에 공감하거나 감정 이입하는 주관적 체험에만 그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주체가 그러한 체험으로 인해 일상과 분리되고, 심미적 객체 안에서 사회적 현실의 원리가 내면화된 자기를 망각하고 상실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자각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관철해 나갈  있도록 하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작품은 사물이지만, 동시에 사물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을 심미적 경험이라고 말할 , 그것은 사물로서 예술작품  이상의 ,  예술작품의 정신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예술작품의 자극을 통해서 이전에 생각해왔던 사고나 생각들에서 벗어나서  차원 업그레이드된 사유가 가능토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도르노가 말한 심미적 경험이 위에서 말한 ‘사진들을 통해서 경험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진이라는 객체를 통해 특히 위에서 말한 사진들의 ‘찰나 통해서 감상자(주체) 부정적 감정의 순간을 오롯이 느끼고 그러한 감정을 통해서 본인 개인의 감정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있으리란 생각이다.
이러한 사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라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통적으로 느끼는 분노와 공감들이 모여 사회적 시선을 형성할  있다는 데에 있다. 앞서서 말했던 연극, <죽음과 소녀> 보면서 받았던 격한 분노와 내가 인간으로서의 무력함의 감정들을 느끼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소름 끼치는 혐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부정적 에피파니 순간을 사진을 통해 느낄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예술의 객체가 개인에서 다수로 넘어가면서 사회적인 연대나 유대감을 쌓고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반성할  있는 계기를 만들고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능까지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은 비극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메시지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인간 사회에 끊임없이 잔류하며 개인의 환희나 쾌락 순간 속에서도 살아남아서 순간순간의 일깨움의 계기로써 작용하고,  이런 불편한 찰나의 이미지들이 ‘불편한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되어야 하는 혹은 전시하려는 함의에 대해서라도  번쯤 상기해볼  있는 계기로서의 의미도 사진이 가지고 있다고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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